명시 감상

조지훈의 「산방(山房)」/ 임보

운수재 2006. 6. 21. 06:26

조지훈의 「산방(山房)」/  임보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 잎은
    새삼 치운데

    볕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 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산방」전문


조지훈(趙芝薰, 1920∼1968) 시의 명편들은 그의 첫 개인 시집 『풀잎 斷章』(1952)에 거의 다 수록되어 있다.
더욱 범위를 좁히면 『청록집』(1946)에 실린 12편의 작품으로 압축될 수 있다.
그러니 조지훈 시의 정수는 그가 『문장』지에 추천을 받던 초창기에 이미 다 드러났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된 이유는 「승무」를 쓸 때와 같은 각고의 노력을 그 뒤의 작품들에서는 쏟지 못했던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조지훈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은 「승무」「봉황수」「고풍의상」등인데 이들은 다 그의 데뷔작들이다.
한 시인의 데뷔작이 대표작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겠지만 어찌 생각하면 이러한 현상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산방」역시 『청록집』에 수록된 초창기의 작품이다.
화자는 드러나 있지 않고 고즈넉한 산사의 정경만 깔끔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8연으로 되어 있으나 2연씩 묶으면 기승전결의 네 마디로 나누어진다.
제1경은 사립과 집, 제2경은 난초와 꿀벌, 제3경은 바위와 이끼, 제4경은 바람과 고사리로 집안 뜰의 몇 정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닫힌 사립'과 '구름에 싸인' 것으로 보아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깊고도 높은 산골짝에 자리한 집이다.
그러니 속세와 절한 고고한 자연 속에 묻혀 있는 산사가 연상된다.
꽃은 사립문 곁 울타리에 자라난 야생화일까. 골짜기에서 조용히 들려오는 청렬한 물소리 때문인지 흔들리고 있다.

뜰 아래 옮겨 심어 놓은 춘란의 푸른 잎새가 모처럼 내린 단비에 촉촉이 젖어 청한하게 느껴진다.
아마 아직 이른봄인가 보다.
따스한 봄볕이 스며드는 미닫이창문을 어디서 왔는지 부지런한 꿀벌 한 마리가 스치며 날아간다.

제법 큰 바위가 마당 한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다.
고색창연히 돋아난 푸른 이끼가 비에 젖어 더욱 싱그럽다. 수만 년 풍설에도 꿈쩍 않고 한 자리에 의연히 버티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부럽다.
'자랑스러라'는 화자가 바위의 입장에서 피력하는 것인데 이는 화자의 바위에 대한 선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스럼'은 '아스라히'의 뜻이리라.
어느 아득히 높고도 먼 곳까지 흔들리게 하는 바람이 문득 일어난다.
그런데 그 바람은 살 속을 파고드는 듯한 차가운 소소리바람이다.
그러자 새로 돋아난 고사리 연한 순이 추운 듯 몸을 움츠려 도르르 말린다.
'아스럼 흔들리는'은 객관적 정황을 그리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화자의 주관적 감각을 객관화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사물이 아니라 주체다.
이러한 기법은 제3연의 '난초 잎'을 통해 추위를 드러내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가급적 화자의 감정을 억제하고 감각적으로 사물을 드러내 보인 것이 정지용의 「春雪」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마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러나 지용의 작품에서와는 달리 이 작품은 그윽한 선미(禪味)를 느끼게 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우선 속세와 격리된(구름에 싸인) 자연이다.
그러니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이 작품의 화자는 은자(隱者)로 보아도 무방하다.
제3연의 '난초'와 제5연의 '바위'는 그 은자의 기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상관물이다.
그는 확고부동한 의지(바위)를 지닌 지사이며, 언젠가 세상을 맑은 향기(난초)로 정화시킬 선비이리라.
더 나아가서 그는 근면하고(꿀벌), 예스런 멋(이끼)을 지니고 있으며, 또한 순결하게(고사리 새순)도 느껴진다.

시인은 사물로 이야기한다. 아니, 말하지 않고 보인다.
예를 들면 '난초처럼 맑게 살아야 한다'라고 말하는 대신 '난초'을 제시해 보인다.
작자의 생각과 감정이 배제된 것처럼 보이는 즉물시나 서경시류의 작품에서도 시인은 사물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의 생각과 감정을 말한다.
시인은 사물의 선택에서부터 이미 발언을 시작하고 있는 셈이다.
예로부터 시화(詩畵)를 달리 보조자 아니함은 이러한 생각에 바탕을 둔 때문이리라.
화선지에 심은 한 그루의 난초로 문인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그러한 것처럼 짧은 한 편의 시 속에 시인들 역시 무궁한 정취를 실어 세상에 내놓는다.
그러나 그 글의 향기는 아무에게나 가 닿지 않는다.
열린 가슴을 가진 맑은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청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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