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자연학교

적막한 소리

운수재 2007. 4. 28. 07:48

 

 

적막한 소리  /   임보

 

 

 한겨울 눈 속에서도 움츠리지 않고 삭풍에 푸른 갈기를 날리며 꿋꿋이 서 있는 한 그루 솔을 보았는가.
 한여름 무더위 속에서도 타는 목을 안고 뜨거운 햇살 넘치게 받으며 의연히 서 있는 한 그루 솔을 보았는가.

 뼈도 없는 푸른 육신으로 땅 위를 뱀처럼 기다가 곧은 나무를 만나면 그 등에 업혀 지상을 박차는 저 기생의 칡덩굴을 보았는가.
 겨울이면 잎들을 다 떨군 채 업힌 나무의 가지에 매달려 죽은 듯 떨고 있는 마른 칡덩굴을 보았는가.

 그 보잘것없는 칡덩굴이 솔을 감고 올라가는 것을 보았는가. 벌떼처럼 기어올라 솔의 어깨와 머리 위에 온통 눌러 앉아 너울거리는 것을 보았는가.
 그리하여 백 년 묵은 솔의 숨통을 드디어 끊어 놓는 것을 보았는가.

 북풍한설(北風寒雪)도 삼복염천(三伏炎天)도 못 꺾던 저 푸른 솔의 절개를 뼈도 없는 저 기생의 천한 칡덩굴이 넘어뜨리는 것을 보았는가.
 세상은 온통 솔들의 무너지는 소리로 적막한 것을 그대는 이제 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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