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자연학교

나무들의 세상 1

운수재 2007. 5. 2. 11:29

 

 

 

나무들의 세상 1  /  임보

 

 

나무는 무엇으로 세상을 볼까
저 허허한 푸른 하늘
저 매끄러운 녹색의 산허리
그리고 저 기름진 들판과 굽이치는 강물을
눈이 없는 나무는 무엇으로 볼까

나무는 무엇으로 세상을 들을까
그들의 가지 끝에 몸을 비비고 지나가는
저 바람들의 숨결
방울새의 저 맑은 지저귐
황소의 저 포만한 울음
여치들의 저 가는 속삭임
그리고 여름 밤하늘을 가르는 저 은은한 천둥소리를
귀도 없는 나무는 무엇으로 들을까

나무는 그들의 친구를 어떻게 알까
눈도 귀도 없는 나무는 그의 곁에
친구들이 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사랑스런 신부 나무가 진홍색 예쁜 꽃을 달고
그대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고
바람과 벌들을 불러 그대의 꽃가루를
그렇게 실어 보내는가

한 그루의 숫은행나무와
한 그루의 암은행나무 사이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을까
빛도 소리도 스며들지 못하는 세상
그 영겁의 어둠 속에서
사랑하고 싶을 때
그들은 무엇으로 말할까

그러나
보지 않고도
듣지 않고도
말하지 않고도
저 은행나무 가지가 휘도록 열매 매달고
몇 백 년 저렇게 서 있는 걸 보면
차라리
우리 사는 이 세상이 부질없음인가
눈 달고 귀 달고 입 코 달고 
복잡다단한 그 세상 시끄러 어이 살아가지?
저 응달의 한 그루 물푸레나무도
우릴 두고 그렇게 웃고 서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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