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이성선의「물을 건너다가」 / 임보
개울을 건너는 아침
징검다리에 엎드려 물을 마시다가
문득 물에 몸 비치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마신다.
성인(聖人)을 먹는다.
물에 떠내려오는 황소를 먹는다.
문살에 비치는 호롱불빛
여물 써는 소리
천도복숭아 가지에 매달린 아이들
감자꽃 사이에서 웃고 있는 할아버지
영혈사(靈穴寺)에서 막 문 열고 나오는
스님도 하나 먹는다.
먹고 그냥 앉아서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디밀고
거꾸로 바라본다.
거울처럼 반짝이는 세상
내 안일까 밖일까
저 아래
염소 한 마리가 또 둑에서 내려와
궁둥이를 하늘로 뻗치고
물을 마시고 있다.
나를 먹는 모양이다.
―「물을 건너다가」전문
이 작품은 이성선(李聖善,1941~2001)의 제5시집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오상,1985)에 수록되어 있다. 화자가 아침에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몸을 구부리고 머리를 숙여 물을 마신다. 아니, 물을 마신 것이 아니라 물 속에 비친 여러 가지의 사물들을 마신다.
물은 사물을 맑고 깨끗이 정화하는 매체다. 따라서 물에 비친 사물들은 정화된 사물들이고 물 속의 세계는 정화된 세상이다. 화자가 존재하는 현실[此岸]과는 달리 물 속의 세계[彼岸]는 정화된 세상― 곧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지금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위에 있다. 수평 이동의 도중에 물을 만난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물 속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 세계는 화자가 존재하는 지상과는 수직적 차별을 지닌 상위(천상)의 세계다. 화자는 그 세계를 물을 통해서 감지하고 있다. 감지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세계에 동화한다. 그것이 곧 마시고 먹는 행위로 표현된다.
물 속 곧 피안의 세계에 어떤 사물들이 등장하는가 살펴보면 재미있다. 나무, 황소, 호롱불빛, 여물 써는 소리, 아이들, 할아버지, 스님 등이다. 이들 정화된 사물들은 사실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파라다이스 : 피안)의 시민(구성원)들로 시인에 의해 선택을 받은 것들이다. 하고많은 사물들 가운데 하필이면 왜 이들을 선택했는가. 선택된 사물들의 특성을 통해 우리는 시인이 지향하는 정신 세계를 짐작할 수 있다.
나무, 나무를 화자는 성인(聖人)이라고 호칭한다. 이 지상의 생명체 가운데 운명적으로 가장 자유스럽지 못한 것이 나무다. 그는 태어난 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한평생을 붙박혀 살아야만 한다. 양지와 음지, 옥토와 박토, 수분과 공기 등을 자의에 따라 선택할 수 없다. 비바람 눈서리 등 그에게 가해진 어떠한 시련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나무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수용한다. 나무의 무한한 인고의 미덕―이 지상의 어떤 성자가 이러한 나무의 미덕을 따를 수 있을 것인가. 화자는 나무에게서 고결한 성인을 느낀다. 그리고 그 덕을 본받아 나무와 하나가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마시는 것이다.
황소, 지상의 동물 가운데서 소만큼 선량한 짐승이 어디 있는가. 덩치나 힘으로 따지자면 범이나 사자를 능가하지만 육식동물과는 달리 거의 공격을 모르는 초식동물이다. 아니 조그만 어린 아이가 끄는 고삐에 매달려서도 순수히 따라간다. 수레에 얹히면 짐을 싣고 가고, 쟁기를 매면 논밭을 갈지 않던가. 그렇게 주인을 위해 한평생 혹사하다가 마지막엔 그의 육신까지 인간에게 다 바치고 떠난다. 그러나 소는 아무런 불평도 말하지 않는다. 그 순종 무언의 미덕을 시인은 높이 샀으리라. 그래서 황소도 시인이 꿈꾸는 이상향의 구성원으로 선택된다. 식물(나무)과 동물(황소)의 대조적 제시도 흥미롭다.
‘문살에 비치는 호롱불빛’과 ‘여물 써는 소리’는 농촌의 단란한 저녁 풍경이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대비도 조화롭다. 소박한 초가의 방안 호롱불 곁에는 아녀자들이 도란거리고 있을 것이고, 남성들은 아직도 오양간 곁에서 작두로 여물을 썰고 있는 정경이다. 반문명적 농경사회를 지향하는 시인의 꿈을 읽을 수 있다. 문명이 생활은 편리하게 발전시킨 것 같지만 사실 문명은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어 인간의 화평을 앗아갔다. 행복의 지수로 따진다면 현대 도시인의 생활이 어찌 고대 농경인의 삶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천도복숭아 가지에 매달린 아이들’과 ‘감자꽃 사이에서 웃고 있는 할아버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모습과 순진무구한 할아버지의 웃음이 잘 어우러진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다.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것 같다. 천상적(가지에 매달린) 유년(아이들)과 지상적(감자꽃밭) 노년(할아버지)의 병치도 조화롭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은 스님이다. 영혈사(靈穴寺), 고유명사이기는 하지만 ‘영혼의 구멍’이라는 의미를 지닌 절이 아닌가. 어쩌면 그 절의 스님은 육신을 이미 떠나 영혼의 세계에 안주하고 있을 듯도 싶다.
화자는 이러한 세상을 두 다리 사이로 얼굴을 디밀고 거꾸로 바라보고 있다. 그 세계는 정화된 이상향이니까 현실과는 반대되는 어쩌면 이승을 뒤집어 놓은 세계일지도 모른다. 화자는 정화된 그 세계를 거울처럼 반짝이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 세상이 화자의 심리적인 내면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객관적(내 밖)으로 실재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사실 이상의 세계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상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또한 이 작품의 흥미로운 구조는 마지막 부분이다. 개울의 하류에 염소를 등장시켜 화자 자신까지를 들여마시게 하는 극적 전환을 설정하고 있다. 염소는 화자보다도 한 단계 높은 정화된 세계와의 동일성을 실현시킨 존재다.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각을 지상적 시각과 수평적 시각 그리고 천상적 시각 등 셋으로 구분한 적이 있다. 지상적 시각의 작품은 현실에 가치를 부여하는 리얼리즘의 시, 수평적 시각의 작품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포착하려는 즉물시(卽物詩) 그리고 천상적 시각의 작품은 사물의 본질이나 피안의 세계를 추구하는 형이상(形而上)의 시가 대표가 된다. 이성선 시인은 현대시인 중 보기 드물게 천상적 시각을 고수했던 시인이다. 그는 자연과 생명 그리고 본질의 세계에 귀를 기울이는 많은 가작들을 남겨 놓고 있다. 이성선은 시 쓰기를 영혼과의 합일을 통해 시도하려 했다. 영혼을 우주의 통로로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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