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감상

김수영의 <죄와 벌>

운수재 2007. 4. 28. 07:28

[명시감상]

 

김수영의 「罪와 罰」 /   임보


남에게 犧牲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명가량의 醉客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犯行의 現場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죄와 벌」전문 (1963.10)


 우리는 때때로 타자를 해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없지 않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꼴불견의 인물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된다. 비열한 정상배, 저속한 종교인, 양심을 저버린 학자, 배반한 친구 등이 우리를 실망케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까운 인척들까지 증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로 하여금 전당포의 인색한 노파를 살해하도록 한다. 인간의 심리 속에 자리한 증오의 본능을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영(金洙瑛, 1921~1968)의 「죄와 벌」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의 제목을 패러디하여 증오에 대한 자신의 폭력 행위를 희화화하고 있다. 즉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적극적인 인물도 못되는 자신을 자조(自嘲)하는 것이리라.

 이 작품에서 증오의 대상은 화자의 ‘여편네’다. 그 동기는 밝혀져 있지 않지만 화자는 어느 비 오는 날 밤 술집이 있는 어두운 거리에서 우산대로 아내를 구타했다. 그러자 데리고 간 어린놈이 놀라 울고 여기 저기서 취객들이 모여들었다. 

 ‘죄’는 아내의 잘못이고 ‘벌’은 자신의 구타 행위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죄’는 아내를 구타한 자신의 행위이고 ‘벌’의 내용은 자기를 아는 누군가가 현장에서 이 광경을 목도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염려)―, 아니 그보다도 버리고 온 지우산에 대한 아까움이라고 할 수도 있다. 어떻든 이 작품에서 ‘죄’와 ‘벌’의 내용은 사회성을 띈 대단한 것은 아니다. 별 대단한 것도 아닌 것을 크게 떠벌리는 여기에 또한 소재에 대한 작자의 야유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제1연에서 화자는 체면의 훼손과 어떠한 손실도 감수하겠다는 충분한 각오가 없이는 살인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이러한 진술의 이면에서도 자신은 살인할 수 있는 배짱도 용기도 없다는 빈정거림을 우리는 읽어낼 수 있다.


 우산대로 길거리에서 아내를 구타하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건, 아내를 버린 지우산만큼도 소중히 생각지 않는―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이다. 보다 아름답고, 선하고, 진실하고, 건전한 것들을 즐겨 다루었던 전통적인 시관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소재다. 그는 윤리나 도덕 같은 기존의 굴레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그는 관습에서조차도 탈피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전통적인 시관에서 중요시했던 진․선․미의 세계에 구애받지 않고 일상적인 사소한 삶의 내용들을 시 속에 끌어들였다. 시의 소재를 제한하지 않고 확대했다고 할 수 있다.

 제2연은 분행(分行)만 했을 뿐이지 산문과 거의 다름없는 글이다. 시문학의 보편적인 특징인 운율이나 압축, 비유 등의 표현 형식에도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시어도 우아하고 아름다운 말을 선택해서 쓰려 하지 않고 머리에 떠오르는 거친 일상어들을 그대로 구사한다. 전통적인 시의 양식에 전혀 구애됨이 없이 표현하고 있다. 시와 산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자유분방한 시 쓰기인 셈이다.

 김수영을 한마디로 ‘자유주의자’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그의 자유 정신이 기존의 틀로부터 그의 시를 해방시켰다. 그의 문학적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소재와 시어의 확대 등을 통해 한국 현대시의 폭을 넓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비판한다면 시가 지닌 아름다움․조화로움․경건함 같은 요소들을 다 떨쳐버림으로 시의 위의(威儀)를 상실케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귀족 문학으로서의 시의 위상을 뭉개버리고 욕설과 야유에 찬 풍자적인 상민문학으로 시를 끌어내린 것이다. 

 아무튼 김수영은 한국현대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풍운아(문제아?)라고 할 수 있다. 비판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현대의 많은 시인들이 김수영의 작품에 아직도 경도되어 있는 사실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의 김수영은 우리 문학사에 필요하지만, 김수영류의 작품들이 우리 시단을 주도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문제는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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