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명시 감상

허균의 <우는 연못>

운수재 2007. 5. 12. 05:28

[명시감상]

 

허균의 「우는 연못[鳴淵]」 /   임보

 

 

교산(蛟山) 허균(許筠, 1569~1618)은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기존의 관습과 제도 그리고 모순에 찬 현실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를 개혁코자 하는 꿈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안타깝게 역사 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에 이르러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허균은 경상감사 허엽(許曄)의 삼남삼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천재적인 여류 시인 난설헌(蘭雪軒)의 동생이며, 최초의 국문소설인 『홍길동전』의 저자로 문학사에서는 익히 알려진 인물이다.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중형 허봉(許篈)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영특하여 『논어』와『통감』을 읽은 지 1년이 채 못 된 12세에 이미 문리를 터득했다고 전한다. 중형의 친구인 이달(李達)에게 당시(唐詩)를 배우고 중형으로부터는 송시(宋詩)를 익혔다.

 

1592년 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24세의 허균은 편모와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피난길에 오른다. 함경도 곡구, 단천에 이르러 첫 아들을 얻었지만 산고로 아내와 자식을 함께 잃는 아픔을 겪는다. 그는 전쟁이 휩쓸고 간 황폐한 민가의 참상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老妻殘日哭荒村    해 지는 석양 황폐한 마을에서 늙은 아낙 통곡하네.

蓬鬂如霜兩眼昏    서리 같은 쑥대머리에 두 눈빛조차 흐릿해라.

未欠債錢囚北戶    아비는 빚 갚을 돈 없어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고,

子從都尉向西原    아들놈은 군관에게 끌려 청주 쪽으로 떠났어라.

家經兵火燒機軸    집안은 난리 통에 기둥 서까래마저 다 불타버리고,

身竄山林失布褌    숲속에 한 몸 숨기다가 베잠방이까지 잃었다네.

産業肅然生意絶    살아갈 길 막막하여 살고 싶은 마음도 끊어졌는데,

官差何事又呼門    관가의 아전은 또 무슨 일로 문 앞에 와 부르는가?

              ―「記見․1」

 

 

 ‘기견(記見)’이란 제목의 이 시는 눈에 보이는 대로 기록한 글이라는 뜻이다. 해질 녘 화자가 어느 한산한 마을에 이르렀는데 늙은 아낙이 통곡을 하고 있다. 흰 머리가 쑥대처럼 엉클어져 있고 생기를 잃은 눈빛이 저녁 하늘처럼 어둡다. 다음은 노파가 울면서 늘어놓는 넋두리의 내용이다. 바깥주인은 빚 갚을 돈이 없어 감옥에 갇힌 신세요. 아들놈은 징집되어 군관에게 끌려갔다고 한다. 전화(戰禍)로 집은 불타버리고 산속에 숨어 지내다 옷가지도 다 잃어버린 형편, 앞길이 막막하여 살아갈 의욕조차 없는데 관원은 문밖에 와서 사람을 부르고 있다. 군량미를 징수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부역(賦役)의 일손을 독촉하러 온 것인지 모를 일이다.

허균이 젊은 시절 남긴 작품들 가운데는 이런 유의 현실 고발적인 시들이 적지 않다. 전란과 관아의 횡포로 말미암아 역경에 처한 백성들의 참담한 실상을 리얼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는 26세에 문과에 급제함으로 벼슬길에 오른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파직과 복직을 되풀이하면서 평탄치 못한 환로의 길을 걸었다. 기생을 너무 많이 거느리고 다닌다고, 혹은 부처를 섬긴다는 이유로, 못된 토호를 과도하게 다루었다고 해서, 전시(殿試)에서 인척을 급제시켰다는 혐의 등으로 수많은 파직과 구금 혹은 귀양살이를 했다. 어떤 때는 임명된 지 채 며칠이 되지도 않아 파직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파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서 몸을 도사릴 줄 몰랐던 그가 위험인물로 여겨져 질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서곤 했다. 지방의 행정관보다는 주로 중국을 드나드는 외교관으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리학보다는 불교와 도교에 더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집권 세력이었던 유학자들보다는 방외인(方外人)들과 즐겨 사귀었다. 제도적인 제약으로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던 재능 있는 서얼(庶孼)들과 어울려 그들의 울분에 공감하기도 했다. 『홍길동전』은 이러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 정신을 배경으로 빚어진 작품이다.

그의 나이 48세에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내 파직되고, 이듬해인 1617년에 다시 좌참찬에 오른다. 그러나 기준격(奇俊格)이라는 제자가 자신의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스승인 허균의 혁명계획을 고발하는 비밀상소를 올린다. 그리하여 1918년 50의 나이로 허균은 그의 심복들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광해군 10년에 있었던 일이다.

허균이 그러한 수난을 겪지 않았더라면 혁명이 가능했을까? 만일 그의 혁명이 성공했더라면 이 땅에서의 인권과 평등의 실현이 수 세기 앞당겨졌을 지도 모른다. 시 「鳴淵(명연)」은 이러한 그의 웅지를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陰竇窺䆗窱    음침한 웅덩이 참 깊고 아득도 해라

幽幽黮環灣    그윽이 검은 기운 물굽이를 감도네.

下有千歲蛇    물밑엔 천년 묵은 이무기 한 마리

佶栗深處蟠    꿈틀대며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어라.

有時吐白氣    때때로 하얀 기운 밖으로 뿜어내면

霏作烟漫漫    흩어져 연기처럼 아득히 번지누나

何時變雷雨    언젠가 때가 오면 천둥 비 일으키며

飛上瑤臺端    날아서 하늘 위로 높이 오를 터인데.

                                   ―「鳴淵」(우는 연못)

 

 

 물안개가 자욱이 감도는 음침한 깊은 소(沼)에 천년 묵은 이무기가 한 마리 살고 있다. 그 깊은 못에 도사리고 있는 이무기가 때때로 포효를 하면 연기 같은 흰 기운이 멀리 서린다. 언젠가 때가 되면 천둥 번개 일으키며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물속에 잠겨 청운의 뜻을 품고 안타깝게 때를 기다릴 뿐이다.

혁명을 꿈꾸는 자신의 모습을 아직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비유했으리라. 시의 제목을 「鳴淵」(우는 연못)이라 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차마 ‘우는 이무기(鳴蛇)’라고 직접적으로 쓸 수 없어서 그렇게 했으리라. 세상에 대한 울분과 천하를 제압하고자 하는 패기가 엿보이는 시다. 허균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의 작품이다. 그의 뜻을 펼칠 수 없었던 것이 참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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