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비평이란 무엇인가

운수재 2007. 5. 25. 06:45

 

비평이란 무엇인가 /  임보

 

비평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사물의 선악(善惡)과 시비(是非)․미추(美醜) 등을 평가하여 논하는 일’로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비평이란 어떤 사물의 ‘가치의 유무(有無)를 따지는 행위’라고 하겠다. 그 가치의 기준이 도덕성일 수도 있고 진실성일 수도 있고 혹은 심미성일 수도 있다. 이 밖에도 효용성이나 창의성 등 다양한 비평의 기준을 설정할 수 있다.

문학비평만 하더라도 이념에 따라 혹은 시대나 지역의 특성에 좇아 비평의 기준도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왔다. 모방론적 입장에서는 작품의 사실성을, 표현론적 입장에서는 작자의 개성을, 효용론적 입장에서는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중요시하여 작품을 평가했다. 신비평에서는 작품 자체의 문학성만을 따지는가 하면 수용미학에서는 독자의 관여까지를 문제삼기도 한다. 아무튼 비평의 기준은 다양하다. 작품을 보는 비평가의 시각에 따라, 혹은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그 비평의 기준이 비평자의 세계관이나 문학관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평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문학 작품을 읽거나 혹은 어떤 영화를 관람하고 난 후에 개인의 취향에 따라 나름대로의 감상을 얘기하기도 한다. 이것도 비평 행위의 일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의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비평의 전문가 곧 비평가는 개인의 취향에 근거한 인상비평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그는 객관성을 지닌 ‘비평의 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아니, 우리는 보통사람들과는 달리 작품을 평가할 수 있는 확고한 기준인 그 ‘잣대’를 구유한 사람에게 비평가라는 직함을 부여한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잣대는 아무나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확고한 세계관과 문학관이 서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비평가는 문장을 잘 매만지는 기능인이기에 앞서 올바른 판단력을 지닌 사상가여야 한다. 오늘날 우리 문단의 비평계는 잘 움직이고 있는가? 공정한 잣대를 가지고 작품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는가? 혹 뚜렷한 세계관도 문학관도 없이 남이 만들어 놓은 잣대들을 빌어 덤벙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비평가의 자리는 작가와 독자의 사이다. 즉 비평가의 궁극적인 소임은 작가가 창작해 놓은 작품을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이해시키는 데 있다. 독자는 비평가들의 비평을 통해서 자기가 미쳐 깨닫지 못하고 지나쳤던 작품 속의 가치를 터득하게도 되고, 아직 접하지 못한 새로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한다. 말하자면 비평가란 작가와 독자 사이에 낀 중개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비평가는 작가에겐 공정하고 독자에겐 친절해야 한다. 그런데 비평가가 이러한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작가나 독자의 머리 위에 올라앉아 군림하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수도 있으리라. 형편없는 작가에게는 따끔하게 일침을 가하여 경종을 울릴 수도 있고, 수준미달의 독자들에게는 교사와 같은 자세로 일깨워 줄 수도 있다. 혹은 못마땅한 문학 현장을 신랄하게 비판할 수도 있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문학관을 피력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니라, 그릇된 의도를 가지고 작가나 독자들을 호도하는 일이 있다면 이는 무서운 행패가 아닐 수 없다. 오늘의 비평가 가운데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있지 않고 혹 어떤 특정 집단이나 출판사 밑에 예속되어 있는 경우는 없는가? 그리하여 한 집단의 투사(鬪士)나 한 출판사의 선전원으로 전락해 있는 자들은 없는가? 하기야 자격 미달의 인물에게 비평가의 관을 씌워 주었다면, 관을 준 자들의 손아귀로부터 쉽게 자유로울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비평은 어려운 글이어서는 곤란하다. 비평뿐만 아니라 모든 글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이상으로 삼는다. 글이 어려워야 할 아무런 명분도 없다. 글쓴이의 지적인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그런 생각으로 현학적인 글쓰기를 하는 이도 없지는 않으리라. 그러나 제대로 된 독자라면 그런 글을 읽고 존경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혹 존경심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별력이 없는 무식한 독자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현시의 현학적인 비평가가 있다면 차라리 장르를 바꾸어 심도 있는 논문을 쓰는 편이 나으리라. 요즈음 어떤 젊은 비평가들이 쓴 글을 보면 난해한 시를 읽는 것보다도 더 난해한 경우가 없지 않다. 시에 사용된 것보다도 더 어려운 비유와 현학적인 외래어들의 남용으로 그 주지가 무엇인지 쉽게 파악이 안 된다. 평생 문학에 관심을 두고 살아온 나에게 있어서도 그렇게 까다로운 글이라면 일반 독자들에게는 더 말할 나위도 없으리라. 비평도 하나의 창작이라는 문학관이 잘못 실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평을 창작으로 보는 견해는 창의적인 비평의 안목을 높이 사고자 하는 것이지 시도 소설도 아닌 새로운 장르의 난해한 잡문을 하나 더 허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이 긴 생명을 가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읽히듯이 비평 역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오래 읽힐 수 있는 글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비평가들도 자신의 글이 고전이 될 수 있도록, 적어도 일회성의 글이 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여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작가와 작품을 고르는 눈이 있어야 한다. 좋은 비평은 역시 좋은 작품을 배경으로 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평가는 작가와 작품을 찾아 괴로운 탐색을 계속하는 탐험가들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매달 산더미처럼 쏟아져 나온 그 많은 작품들을 대상으로 옥석을 가린다는 것은 고역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비평가는 그러한 고역의 감내(堪耐)를 스스로 선택한 전문 독서가들이 아닌가. 그러니 쓰레기 더미 속에 묻힐 지도 모르는 보석을 찾기 위해 불철주야 형형(炯炯)한 탐색의 눈길을 멈출 수가 없다. 어떤 게으른 비평가는 남이 찾아놓은 작가나 작품을 쫓아다니면서 뒷북을 치며 부화뇌동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것처럼 무가치한 행위가 어디 있겠는가. 마치 남의 둥지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려 하는 교활한 새의 무리들과 다를 것이 없다.

 

거듭 말하거니와 비평가는 모름지기 자기만의 확고한 세계관과 문학관을 지닌 사상가여야 한다. 비평가는 어떠한 외부의 세력에도 흔들림이 없이 작가와 독자의 중간에 놓인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작가들에게는 세상을 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감동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도록 격려하고, 독자들에게는 보다 양질의 작품을 선택하여 읽을 수 있도록 친절한 안내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비평가는 부화뇌동자가 아니라 창조자며, 권위주의자가 아니라 봉사자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의 비평은 작가와 독자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 길이 살아남는 구원의 생명을 누릴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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