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碑와 全集 / 임보
우리나라만큼 시비를 많이 가진 나라도 아마 흔치 않을 것이다. 이르는 고장마다 어렵지 않게 시비를 만날 수 있다. 시비를 집단적으로 세워 놓은 시비 공원도 드물지 않다. 이 땅에 시를 쓰는 시인들이 넘치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렇게 흔한지 모르겠다. 좋은 시의 구절을 돌에 새겨 두고두고 후손들에게 읽힘으로 세상을 밝게 할 수 있다면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을 기념하기 위해서 돌을 세우는 일은 문자가 발명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세계 여러 곳에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인위적인 입석(立石)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문자와 더불어 세워진 비들은 영토를 표시하기 위한 경계비, 치적이나 공로를 기리는 공적비, 그리고 무덤 앞에 세워진 묘비 등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선가 시의 구절을 새긴 시비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명승고적지를 찾아가 보면 널따란 암반이나 석벽에 사람의 이름과 함께 시구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만나게 된다. 한편 유명한 정자의 처마 밑에도 시를 새긴 현판들이 걸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마도 명승지의 암석이나 정자의 현판에 시를 새긴 것이 시비의 기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의 무덤이나 연고지에 후대의 사람들이 그 시인을 추모하는 뜻으로 시비를 세운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한평생 시에 매달려 어렵게 살다 간 한 시인을 위로하는 뜻이 거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니, 아름다운 시들로 세상을 밝게 한 시인이라면 그의 명구를 돌에 새겨 오고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이 어찌 바람직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아직 살아있는 시인의 시비를 세우는 일은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생전에 대단한 이름을 얻은 시인이라 하더라도 아직 창작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시인이라면 그 시인을 기념하는 시비는 서둘러 세울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앞으로 더욱 훌륭한 명구를 생산해 낼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세상의 기대와는 달리 변하고 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급한 시인들은 생전에 자신의 시비를 미리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남이 세워 주기를 기다리지 못해 손수 세우기도 한 모양이다.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이니 이를 크게 탓할 일이 아닐까? 그러나 겸손이 미덕으로 평가되는 동양적인 관습에서는 쉽게 용납하기가 어렵다.
요즈음 웬만큼 능력을 지닌 문인이라면 환갑이나 고희를 맞는 나이에 전집들을 간행하기도 한다. 저명한 문인인 경우는 출판사가 상업성을 생각해 만들어 내기도 하고, 제자들을 많이 거느린 경우는 후학들의 손에 의해 간행되기도 한다. 이밖에도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전집을 묶어내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전집이란 한 작가가 한평생 생산해 낸 모든 작품들을 총망라한 작품집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둔다면 독자들이나 문학 연구가들이 일목요연하게 작품을 찾아볼 수 있어 편리할 것이다. 그러니 전집을 간행한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를 지닌 일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아직 작품 활동이 끝나지 않은 작가의 전집을 서둘러 만든다는 것도 별로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장차 새로운 작품들이 생산될수록 그 전집은 온전한 전집의 구실을 못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한편 서둘러 전집을 갖고자 하는 데에는 남에 대한 배려보다는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이 더 앞선 것 같아 개운치가 않다. 더군다나 일고의 가치도 없는 우수마발(牛溲馬勃)의 글들이라면 이는 세상에 번거로움만 더하는 것이니 못마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찍이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속상해 하지 않는 이가 군자’(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라고 말했다. 이 말은 겸손한 사람에 대한 위무와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에 대한 비판을 아울러 담고 있다. 자기현시의 욕구를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음을 간파한 말이기도 하다.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내게 한 스승이 계셨다. 고등학교 때의 국어교사였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나에게 세상에 대한 눈을 뜨게 했던 분이다. 그분은 교과서에 얽매이지 않고 문학과 철학을 넘나들며 우리를 가르쳤다. 생의 철학자 린위당(林語堂),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그리고 실존주의의 사르트르와 까뮈 등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선생님 때문이었다. 동경 유학을 한 분으로 안목이 열려 있었고 위트와 유머가 넘친 수필을 즐겨 쓰셨다.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그분의 수필 코너를 만들어 성우로 하여금 연속 낭독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문단 등단을 거부하셨으며 당신의 생전에 문집이 세상에 나오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이 수차례 찾아가서 원고를 내어달라고 간청했지만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문집이란 당사자가 세상을 떠난 뒤 후대에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셨던 것이다. 그런 선생님의 곧은 자세를 보면서 시답잖은 글들이 모이기가 무섭게 시집으로 묶어내고자 했던 내 자신을 얼마나 부끄럽게 여겼는지 모른다. 선생님은 근대교육을 받고 새로운 문화와 사상에 익숙하셨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선비정신을 잃지 않으셨던 분이다. 무자기(無自欺)의 무서운 신조를 잃지 않은 곧은 선비였다.
지금은 저 세상에 계시지만 어쩌면 아직도 선생님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드러난 것을 별로 탐탁해 하지 않으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유공희(柳孔熙, 1922~2003)라는 그분의 존함을 감출 수가 없다. 이젠 선생님의 문집을 엮어 영전에 바쳐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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