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의 산문들/에세이

영감과 현기

운수재 2007. 4. 8. 07:35

 

영감(靈感)과 현기(眩氣) /   임보


 영감(靈感)이라는 말이 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신묘한 느낌을 이르는 말이다. 사전에는 ‘신령스러운 예감’ ‘신령의 미묘한 작용으로 얻어지는 감정’ ‘묘한 감응’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靈)’은 신령 곧 신이나 영혼을 뜻하는 글자니 영감은 불가사의한 어떤 작용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귀한 느낌인 것 같다. 

 예로부터 시는 영감에 의해 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말하자면 시는 인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진 천혜의 글로 여겼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시는 일상적인 감흥을 넘어선 어떤 계시적 성격을 띈 글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는 시의 출발을 주사(呪詞)로 보고 최초의 시인을 무격(巫覡)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는데 이와 연관해서 ‘영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시의 신묘함과 시작(詩作) 행위의 신성함을 뜻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시의 싹이 될 수 있는 생각을 우리는 시상(詩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영감은 문득 떠오른 빼어난 시상이라고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영감이라는 그 빼어난 시상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아무에게나 불쑥 찾아오는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영감은 결코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자연 발생적인 우연한 상념은 아니다. 평소에 시를 골똘히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는 만날 수 없는 귀한 체험이다.

 영감은 열심히 준비하고 기다리는 이에게만 찾아온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영감이 찾아오기를 바란다면 이는 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연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다. 감을 얻고 싶으면 사다리를 만들어 감나무에 올라야 하고, 장대를 이용해 감을 따는 수고를 아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좋은 시상을 얻으려거든 그를 탐색하며 찾아나서야 한다. 광부가 광맥을 찾아 수천 길 지하의 갱도를 파 내려가듯 시인도 시의 광맥을 찾아 광막한 사고(思考)의 지층을 파헤치는 노고를 치러야 한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찾아오는 영감은 없다.


 한편 영감이 곧 시가 되지는 않는다. 갱도에서 얻은 광석이 보석이 되기 위해서는 정련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영감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숙련의 과정이 필요하다.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시의 씨앗을 수태한 계기를 맞았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부가 수태한 후 일정한 기간 동안 혼신의 힘을 기울여 태아를 길러내듯 시인 역시 시를 잉태한 후 하나의 작품이 되어 세상에 나오기까지 산고를 겪어야 한다. 시인의 체내에서 충분한 숙성을 거치지 못하고 태어난 작품은 조기분만의 미숙아처럼 허약할 수밖에 없다. 영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숙성시켜 원만한 작품으로 완성하는 일이 더 소중하다.


 지금도 영감에 의지하여 시들을 쓰는가? 글쎄 그런 생각을 갖고 시를 쓰는 젊은 시인들은 별로 많은 것 같지 않다. 바쁜 세상에 영감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시를 쓰는 느긋한 시인을 생각하기 쉽지 않다. 농부들은 농작물이 채 여물기도 전에 입도선매(立稻先賣)를 하고, 어부들은 고기떼가 연안에 도달하기도 전에 먼 바다에 먼저 나가 그물을 드리우는 세상이니 시인들이라고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영감을 기다리기는커녕 영감 비슷한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전에 어쩌면 시의 옷을 입혀 조급히 세상에 내놓을 지도 모른다. 그런 때문인지 요즈음의 어떤 시들을 대하면 설익은 풋과일을 씹을 때처럼 껄끄럽고 역겹기만 하다. 아니, 어떤 글은 머리를 혼미케 하는 현기(眩氣)를 느끼게도 한다.


 어찌 보면 요즈음의 시인들은 영감보다는 현기에 더 친숙해 있는 것도 같다. 현기(眩氣)는 눈이 아찔하고 머리가 어지러운 기운 곧 어지럼증이다. 현대 소시민들은 복잡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고뇌와 갈등에 시달리겠는가. 시인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으리라. 아니 감성적인 시인이기 때문에 오히려 보통 사람들보다 더욱 괴로움에 사로잡힐지  모른다. 그 내면의 울적한 소용돌이가 현기를 유발할 수도 있으리라. 그런데 만약 시인이 현기를 영감으로 착각하고 시를 쓴다면 이는 심히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혹 현기가 영감을 동반하는 경우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영감과 현기를 혼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영감은 정신의 원활에서 생성된 빼어난 감응이지만 현기는 육신의 허약에서 생겨난 정신의 혼몽한 증상이다. 혹 현기가 동기가 되어 작품을 만들 수 있을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만일 현기 자체가 시가 된다면 이는 정화의 기능을 갖추지 못한 혼란스런 언술일 수밖에 없다. 심리적 혼란에서 빚어진 부분별한 글을 읽고 감동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시라는 글을 너무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물질주의가 빚어낸 이 시대의 정신적 공허와 삭막을 무엇으로 치유한단 말인가. 나는 예술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상처난 영혼을 어루만져 줄 감동적인 작품들에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음악이나 미술과 더불어 따스한 시의 기능이 요구된다. 어려운 세상이 필요로 한 것은 넋두리가 아니라 위무(慰撫)의 노래다. 위무는 다름 아닌 감동의 손길이다.

 그러니까 영감은 달리 말하면 감동적인 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만일 세상을 위무할 수 있는 시를 낳고자 한다면 영감을 기다려 시를 잉태하는 인내의 값을 치러야 한다. 현기에 넘어지는 허약한 시인에게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시 200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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