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토막의 추억 / 유공희
원작은 스탕달의 단편 「바니나 바니니」.
그것도 학생 시절에 읽은 줄거리의 기억만을 더듬어 해방 직후의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번안(飜案) 각색(脚色)한 3막짜리가 대본이었다.
해방이 된 지도 반년이 지난 1946년 봄. 상해 교외의 방직공장 터에서 귀국일만을 기다리다 허기져 버린 1,500명의 한 핏줄의 젊은이들….
밤을 새워가며 각본을 마련하고, 배우를 물색하는데 여주인공으로 발탁된 K군은 그 천성의 음성과 용모가 희한하였다.
가발은 쌀포대를 풀어서 먹물로 물들인데다 와셀린을 바른 것이었고, 화장품은 백분(白粉)이 흰 분필가루에, 연지가 빨간 분필가루요, 루우즈는 머큐롬 액이었다.
분장을 하고 난 K군은 누구나 한눈에 반해 버릴 만큼 예쁜 여주인공이 되었다.
그런데 이 여주인공은 그 외모와는 반대로 암기력이 딱하리만큼 빈약해서 도무지 대사를 외지 못하는 것이다.
공병대(工兵隊) 출신을 동원해서 만든 야외무대도 근사(?)했고 광고도 돌릴만치 돌려서 만원의 성황이 될 것은 뻔한데, 미모의 스타가 다만 프롬프터의 메아리 노릇밖에 못해서야….
공연(?) 날짜도 눈앞에 닥치고…. 나는 결단을 내렸다. 주연까지도 도맡아 버리기로….
별들도 숨을 죽인 밤하늘 아래 천막도 없는 노천극장은 예상대로 초만원.
클라이맥스랄 수도 있는 제2장 끝장면― 변심했던 여주인공이 회개하고 감옥으로 독립투사인 남주인공을 찾아가서 탈옥(脫獄)을 종용하고 사랑을 맹세한다.
격분한 남주인공이
“네가 원하는 남성은 이 땅 위에 쇠털같이 많다!”
일갈하며 여인을 되게 찬다. 여인은 쓰러져서 몹시 흐느낀다.
그때 나는 정말로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던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런데 웬일일까?
무대 앞에서 심각한 감동으로 소리 하나 없어야 할 관객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마침 막이 내릴 때이기도 했지만 나는 당황 실색(失色)해서 손짓으로
“빨리 막(幕)을…”
하고 연출의 사명을 다한 뒤 아직 눈물도 마르지 않은 한쪽 눈으로 막이 내린 것을 확인하고 벌떡 일어나
“웬일이야?”
하고 주위에게 물었다.
연출을 거들어 주던 친구들조차 아직도 웃음을 못 참는 얼굴로
“아무튼 굉장한 열연(熱演)이었어!”
“?”
“오늘밤은 봄바람까지 유난히 기분을 내는군. 자네가 쓰러지는 찰나 멀리 양자강에서 불어온 훈풍(薰風)이 자네 치마를 어깨 위까지 훨떡 까올렸지 뭔가! 그래 그 밑으로 날씬이 아니라 울울창창한 두 다리가 스포트 라이트 속에 클로즈업되고 말았으니 상상 좀 해 보게…”
그러나 이국 만리에서 귀국일을 기다리다 허탈 상태에 빠진 우리들에게 한동안 같은 핏줄로서의 짙은 유대감을 맛보게 한 것이 이 서투른 한 토막의 소인극(素人劇)이었던 것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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