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산문

좌석제 인생 / 유공희

운수재 2007. 7. 12. 05:55

 

좌석제(座席制) 인생  /   유공희

 

좌석제라는 것이 도시 돼먹지 않은 것 같다.

제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점은, 모든 것이 전투태세가 되어 버린 세태에서 시름 놓이는 노릇이기는 하나 옆자리에 어떤 인물이 와서 앉게 되나 하는 관심이 적잖은 마음의 부담이 되는 것이다.

자기 옆에 골리앗 같은 괴물이 와서 앉는다 해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 좌석제에는 따르기 마련인 것이다.

 

몇 해 전 오랜만에 고향에 다녀오려고 야간열차의 2등을 탔다.

열차의 좌석은 홀수 번호가 창측(窓側)이고, 짝수 번호가 통로 쪽인데, 그날 밤 내 승차권의 좌석 번호는 짝수였다.

낮 같으면 좀 불만했을 일이나, 차창 밖에 어둠밖에는 내다볼 것이 없는 야간열차의 경우 그다지 불만스러울 것도 없다.

다만 어떤 인물이 하룻밤의 이웃이 되느냐에 온 관심을 모으고 있는 터인데, 발차 직전에 헐레벌떡 나타나서 옆자리에 틀어박히다시피 털썩 주저앉은 것은 아뿔싸! 가죽부대 같은 초 헤비급 거한(巨漢)이 아닌가!

나는 이 처참한 숙명 앞에 각각으로 졸아들면서 좌석제에 대한 저주를 소리없이 독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잠을 만족히 잘 수 있으려면 언제나 세 가지의 조건이 필수다.

첫째 불을 꺼야 할 것, 둘째 철저히 조용해야 할 것, 셋째 적어도 내 몸의 두 배 이상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할 것.

내 집 아닌 열차 안이므로 모든 조건을 대폭 양보할 각오이었지만, 셋째 조건이 너무도 무참히 말살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나머지 한 조건마저 여지없이 유린되고 말았다.

무정한 내 이웃은 내 쪽으로 그 엄청난 엉덩이를 돌려 나를 거의 질식 상태로 몰아넣고 고개를 모로 눕히더니 사양없이 드르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어떠한 소음보다도 이 양반의 ‘드르렁’ 앞에서는 거의 감수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드르렁’은 어느 것이나 단조로운 반복음이 아니라, 실로 복잡기괴한, 진동음인 동시에 이따금 옆 사람의 정신을 아슬아슬하게 만드는 요소조차 있어서, 나의 신경은 그 소리 앞에서는 마치 장글 속에서 곰을 만난 외로운 소년같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향에 다녀오겠다는 계획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시체처럼 맥없이 소모되어 가는 내 옆에서 좌석의 70% 내지 80%까지 부풀었다 줄었다 하면서 이 저주스런 이웃은 그날 밤이 새도록 내 생존을 위압했던 것이다.

내가 좌석제라는 것을 저주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러나 운이 좋아 이웃만 잘 만나면 좌석제가 구태여 저주의 대상이 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도 그날 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있던 어느 여름, 울릉도 구경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대구에서 서울행 특급열차를 탔다. 좌석 번호는 71번이었다.

홀수이니 창측이 틀림없어 우선 다행이라 여기면서 막상 열차 안에 들어가 자리를 잡고 보니 바로 변소 옆이 아닌가!

이런 제기랄! 그러나 이 또 숙명이거니 싶어 체념하기로 하고 창가에 기대어 앉은 다음 이번에는 나타날 이웃이 걱정이었다.

그날 밤의 거인이 불길하게 눈앞에 떠올랐다. 그러나 발차 직전 허둥지둥 내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의외에도 날씬한 미니 아가씨였다.

나는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가슴이 뛰었다. 그럴수록 신사체면을 정중히 견지하고 있는 중, 열차가 달리기 시작하자 나의 향기로운 이웃은 아름다운 음성을 던져왔다.

“이 차 서울 도착이 몇 시지요?”

“0시 0분이라더군요.”

점잖은 내 대답.

“아유, 다섯 시간이나 어떻게 지루해서 견디지요?”

계획도 안 했던 근사한 대답이 내 입에서 굴러나왔다.

“여행이란 꼭 목적지에 빨리 닿는 것만이 멋은 아니쟎소. 도중을 즐기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요?”

내 이웃은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마침내 이렇게 비약했다.

“참 다행이에요.”

“뭐가요?”

“선생님같이 말씀 재미있게 하시는 분하고 길동무가 되었으니 말예요.”

그녀는 왕년의 나의 그 암담한 체험을 알 리가 없을 터였다.

"천만에! 그건 내가 먼저 할 말이었지요.”

나는 좌석제라는 것을 저주하게 되었던 사연과, 좌석제가 미상불 저주의 대상만도 아니라는 이유를 부드럽게 피력하였다.

한바탕 서로 웃고 나서 인사를 나누었다.

여행의 즐거움은 무엇보다 전투태세에서 완전한 무장해제로 인심(人心)을 해방시켜 주는 데 있지 않을까?

서울의 노상 같으면 깍듯이 자기소개까지 하고 덤벼도 낯모른 사람에 대한 대화는 반가운 것이 아니다.

 나의 이웃과 나는 인사라는 절차를 밟기도 전에 이미 인간적인 교섭을 가진 것이다.

나의 상냥한 이웃은 C대학 고전무용과 졸업반이라고 했고, 졸업 기념 공연 때는 꼭 초대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잘 익은 수밀도를 권했다.

수밀도처럼 달큼한 시간이 열차의 속도의 리듬을 반주로 쾌적하게 흘렀다.

점심때가 되었을 때 나는 용약(勇躍) 내 아름다운 이웃을 열차식당으로 초대했다.

그녀는 만면의 희색(喜色)으로 응해 주었다. 선풍기가 신명지게 돌아가는 환한 열차식당. 창밖은 무르녹은 한여름의 강산이 흐르고, 우리는 맛있는 서양요리를 먹으면서 연인들처럼 이야기했다.

“아까 내가 여행의 맛은 도중을 즐기는 데 있다고 했는데, 무엇이나 도중을 즐길 줄 아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네, 그걸 지금 잘 알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대화는 모름지기 적절한 비약과 끊임없는 잉태(孕胎)가 있어야 하는 법.

“도중, 다시 말해서 일의 과정 그 자체가 즐겁고 또 보람이 있는 것이 여행 말고 또 있을 것 같은데…”

“… 식사?”

“멋있군! 적어도 지금은 그렇구먼. 또?”

“……”

“당신이 하는 거…”

“?”

“무용!”

“오, 참 그렇군요.”

“무용은 100미터 경기와는 다르지 않을까? 무진장하게 개화(開花)하는 육체의 시(詩)!”

“멋있어요.”

“무용을 하는 사람이 더 멋있지!”

“호호호, 산보는 어때요? 산보는 목적지 없이 걷는 거 아녜요?”

“그렇군! 산책하는 사람은 고대의 신들처럼 보일 때가 있지.”

“왜 그럴까요?”

“이 지상의 생태를 보고 있으면 무용이나 산책 같은 것은 원래 천상의 풍속이 아니었나 여겨질 때가 있거든…”

“조금 알 것 같아요.”

“연애는 어떨까?”

“어머나, 결혼이란 고올이 있지 않아요?”

“연애를 100미터 경기나 마라톤처럼 해야 하나?”

“호호호호”

“하하하하”

‘호호호호’는 완전히 공감한다는 신호요, ‘하하하하’는 매우 흡족하다는 신호다. 이윽고 그녀는

“또 무엇 없어요?”

연애론은 더 언급할 것이 없고

“인생 자체를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기 전에 ‘유희(遊戱)하는 천사(天使)’가 아니었을까?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 인간)!”

‘인생=무용’이라는 정리(定理)를 음미해 보려는 것일까? 그녀는 창 밖으로 눈을 옮겨 잠시 명상에 잠기는 듯했다.

그날 오후 서울역 앞에서 헤어질 때 나의 아름다운 길동무는 기념 공연에 꼭 와야 한다고 몇 번이고 다짐을 했고, 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춤을 꼭 보겠다고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속에서 문득 맹자(孟子)의 이른 바 ‘삼락(三樂)’이라는 것이 왠지 허망스러운 개념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父母俱存兄弟無故, 仰不愧於天俯不怍於人, 得天下英才敎育之’라는 것이 ‘낙(樂)’이 된다는 것을 결코 이해 못 할 바 아니나,

아직 군자(君子)의 곁에도 못 갈 위인인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그날 저녁 내가 생각해 본 ‘삼락(三樂)’은 뭐니 뭐니 해도 첫째 ‘맛있는 요리를 먹는 일’이요, 둘째 ‘아름다운 여인 곁에 있는 일’이요, 셋째 ‘마음을 풀어 놓고 여행하는 일’이었다.

울릉도의 인상도 오래 잊지 못할 추억이지만, 그 여대생과의 차중(車中) 몇 시간은 ‘군자’ 아닌 범골(凡骨)이 그 ‘삼락’을 몽땅 한 자리에서 누린 셈이었으니 또한 즐거운 추억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다시 해 보면 인생 자체가 저주할 수도 있고 찬미할 수도 있는 하나의 좌석제 열차 같은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요즘 나는, 집안에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한 우거지국이라도 맛있는 요리로 알고 또 내 조강지처(糟糠之妻)와 이별하지 않는 한 오다가다 만난 미녀이거니 여기고,

그날 그날을 한낱 여행으로 생각하면서 일상에서 나의 ‘삼락’을 실감나게 누려 보려고 애를 쓰는 중이다.

그것이 또 내가 ‘군자’가 되어 가는 길이 아닐까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1973. 수필문학,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