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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만의 인생 / 유공희

운수재 2007. 7. 26. 02:32

 

한 번만의 인생  /   유공희

 

인간은 모체 내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자신 속에서 ‘죽음’을 기르기 시작한다고 릴케는 말했다.

인간이 그날그날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접근해 간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분명히 선고 받은 고독한 ‘사형수’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는 이 엄숙한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태평하고 안이하게 그날그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신의(精神醫)의 관찰에 의하면 이미 선고 받은 사형수와 무기수의 옥중 생활은 매우 대조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사형수는 이따금 활력이 넘치는 정력적인 행동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는데 무기수는 낙천적일 만치 조용하게 권태로운 나날을 보낸다고 한다.

눈앞에 닥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똑바로 정시(正視)하기 싫은 인간의 본능적 저항이 사형수에게 이상한 활력의 정체라면, ‘죽음’이 아득한 미래의 사실로 가물거리는 현실의 그 변화 없는 시간들이 무기수의 권태를 자아내게 하는 지도 모른다.

사형수의 그날그날이 말하자면 극히 농축(濃縮)된 시간의 연속이라면 무기수의 그날그날은 극히 희석(稀釋)된 하품 나는 시간의 연속일까?

우리는 사형수일까? 무기수일까? 자기의 운명을 직시하면 누구나 선고 받은 사형수임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생활은 터무니없이 낙천적인 권태로운 나날이 아닌가!

사형수가 무기수같이 하품을 하고 살고 있다는 사실은 참 흥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짧다는 인생이 실은 너무 긴 것일까?

「인간 최후의 말」이라는 책을 읽은 일이 있다.

동서고금의 인간들이 죽는 순간에 남긴 말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모든 인간이 ‘죽음’ 앞에서는 고독한 양(羊)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았다.

권력과 부귀를 한 몸에 누리던 제왕도, 만인 앞에 호령하던 장군도, 득의양양하던 출세주의자도 ‘죽음’ 앞에서는 모두 다소곳해지고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았다.

그들이 인생을 한 번 더 누리게 된다면 어떤 자세로 두 번째 인생을 설계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그들이란 다름 아닌 나요, 너다. 그런데 실은 우리에게 단 한 번의 인생을 허락했다.

단 한 번만의 인생! 우리가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은 바로 이 사실이 아닐까?

두 번 다시 누릴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에 우리의 설계는 아주 슬기로운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인생관을 찾고 삶의 가치를 모색하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은 많은 지식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닌 성싶다.

지식보다도 사상이어야 할 것 같은데 슬기를 동반하지 않는 사상은 위태로운 것만 같다.

그 슬기의 모체는 쉴 사이 없이 제 속에 ‘죽음’을 기르며 사는 인생에 대한 깊은 사랑이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참다운 슬기에는 그윽한 인간의 입김이 풍겨야 할 것이다.

나는 조용한 밤의 시간을 좋아한다.

그것은 나에게 경건하고 밀도 높은 명상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으면 한시도 오만하게 굴 수 없는 것이 인생이요, 누구도 미워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고 느끼면서 내 마음은 짝없이 얌전해지는 것이다.

이 농축된 밤의 시간 속에서 한 ‘사형수’인 나의 모든 활력을 저 숱한 별들이 송두리째 앗아가기 때문일까? (1977. 佛光,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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