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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일의 미학 / 유공희

운수재 2007. 8. 1. 07:01

 

베일의 미학  /   유공희

 

세종문화회관 개관 기념 공연 때 나는 로열발레단을 참 감명 깊게 감상했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그 무용단이 보여준 예술이 아니다.

오랜만에 호화로운 극장엘 가 본 때문인지 눈앞에 널찍하게 드리워 무대를 가리고 있는 막(幕)의 인상이, 보고 싶은 춤보다도 먼저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관중이 미묘한 흥분을 달래면서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는 그 막의 의미에 생각이 몰렸다.

마술사가 깜짝 놀랄 마술을 보여주기에 앞서 보자기로 가리어 구경꾼을 흥분시키듯이 그 저편에 찬란한 경이(驚異)를 감춘 채 그 경이를 알뜰하게 보여주리라는 약속의 표상(表象)으로서 또 따분한 일상생활에서 시달리는 인간들 앞에 곧 꿈의 피안(彼岸)이 열린다는 표징(表徵)으로서 신비로운 막은 모든 사람을 하나같이 행복한 흥분으로 사로잡는 것이다.

막은 차원이 다른 두 개의 세계를 차단하면서 이윽고 두 세계가 합일될 것을 약속한다.

막이 갖는 이와 같은 상징적인 의미를 나는 일상생활의 이모저모에서 보고 느낀다.

기념물을 건조(建造)해 놓고 잠시 베일로 가리어 두었다가 일상세계로 맞아들이는 제막식(除幕式)이라는 의식을 나는 매우 의미심장한 행사라고 생각한다.

신랑이 꽃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장소에서 하얀 면사포를 조심스레 걷어올리는 장면을 보면 나는 언제나 흐뭇한 감동에 젖는다.

화창한 아침을 향해서 커튼을 걷으면 생활의 희열이 몸에 와 닿고, 밀려오는 어둠을 맞아 커튼을 치면 삶의 안도(安堵)와 평화가 몸을 감싸 준다.

선물을 받을 때면 그 자리에서 고운 포장을 뜯는 것이 옳은 범절일 것 같지 않아 어루만지기만 한다.

편지를 봉서(封書)로 쓰지 않고 엽서로 띄우는 것은 천덕스러운 짓인 것만 같다.

나는 수영복 차림의 여성보다도 한복 차림의 여성에게서 더 매력을 느낀다.

여성의 미는 타고난 육신보다도 단장(丹粧)의 신비성 속에서 살아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침 햇볕이 부챗살처럼 피어오를 무렵 거울 앞에서 조용히 단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는 여인의 자태는 눈부신 신화(神話)를 목도(目睹)하는 것 같은 감회를 준다.

아직 조화를 얻지 못한 형자(形姿)가 하나 커다란 거울의 타원 속에서 태동하고 있다.

마치 날개가 돋으려는 기미에 몸을 꼬는 신비로운 생물처럼….

황금빛 햇살이 피어오르고, 모든 구석에서 밤의 그림자들이 사라져 가는데 그녀의 하얀 손가락들이 분주히 형자의 탄생을 재촉한다.

이윽고 그녀는 그 선천의 무구(無垢)가 파닥거리던 신비로운 거울의 타원 속에서 태어나 조용히 공간을 수정하면서 일어선다.

지상의 유열(愉悅)을 암시하는 갖가지 오묘한 선이 그녀의 하얀 버선발에서부터 굽이쳐 오른다.

그녀는 이제 애매한 육체의 어둠에서 시원스럽게 해탈하는 것이다.

혼돈(混沌)에서 질서(秩序)로 변신한 그녀는 마침내 춤의 리듬으로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다의 거품 속에서 태어난 나체의 비너스보다도 아침마다 거울 속에서 탄생하는 의상(衣裳)의 그녀가 얼마나 여신(女神)다운가! 베일의 미학은 옷 입는 즐거움 속에서 행복의 미학으로 숨쉬기 시작한다.

베일의 미학은 예부터 우리 동양인의 생활과 예술 속에 역력히 맥동하고 있다.

산수도에서 보는 그 풍성한 여백이 그것이다.

안개인지 구름인지 산봉(山峰)과 계곡을 감싸는 하얀 여백은 자연과 인생과의 은근한 교감으로 짜여진 신비한 베일이다.

강물은 하늘에 이어지고 하늘 속에 노니는 범선(帆船)은 그 교감 속에 부푼 인간의 가슴이다.

동양의 고전(古典)을 펴볼 때마다 느끼는 것은 말씀들이 모두 논리가 아닌 비유(譬喩)라는 점이다.

넌지시 암시만 던져 놓고 그 속뜻이 제자의 마음속에서 동트기를 기다리는 멋이 기막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식보다도 슬기와 인격을 흐뭇하게 주고받아 오는 그윽한 베일이 너울거리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의 사제간에 오가는 대화의 양상을 생각하면 눈물겹도록 부러운 생각이 치민다.

석가모니가 말 한마디 없이 연꽃을 꺾어 보이자 제자가 뜻을 알고 미소짓는 장면에 이르면 이 세상 이야기 같지가 않다.

베일이 사물을 신비롭게 만들어 주는 이치는 거리(距離)가 사물을 아름답게 해 주는 이치와도 비슷하다. 베일의 미학은 곧 거리의 미학에 통하는 것이다.

같은 대자연의 품속에서 살아오면서도 서양인은 먼데 것을 너무 잡으려고만 해 왔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슬기 있는 사람들은 잡는 영광보다도 잡는 비애를 더 깊이 깨달았다.

우리 동양인은 잡으려고 하기보다 멀리 두고 보기를 좋아한다.

두고 보는 데서 서양인과는 차원이 다른 철학과 슬기가 꽃핀 것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값진 것이요, 이미 잡힌 것은 무미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저들은 달려가 얼싸안는다. 그러나 우리는 멀리서 그윽한 웃음으로 반긴다.

우리 조상들의 이른바 애이불비(哀以不悲)하고 낙이불음(樂以不淫)하고 화이불류(和以不流)하던 그 은근한 삶의 모습들은 모두 베일의 미학 내지 거리의 미학을 터득한 생활의 지혜인 것이다.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두는 슬기와, 내(內)와 외(外) 사이에 베일을 치는 정은 서로 다르지 않다.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꽃’을 바라보는 마음과, ‘가실 길에 진달래꽃을 뿌리는’ 정이 인연처럼 오가며 수놓아진 우리 마음속에 수틀이 무너져 가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1979. 수필문학,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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