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시들의 잔치에서 본 일곱 개의 낙엽
- 덫을 놓은 자들과 덫에 걸린 자들의 초상
이 인 평(시인)
1
그들의 시는 죽었다
숨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
살 한 점
뼛조각 하나도 남지 않았다
그들의 죽은 시에는
혀가 머물다 간 턱뼈도 없고
심장이 뛰놀다 간 늑골 하나도 남지 않았다
마른 나뭇잎 하나도 만날 수 없었다
그들의 시에는
소리도, 의미의 형체도, 그림자의 흔적도 없었다
그들의 시는 완벽하게 죽었다
2
모든 인간들이 죽어 가는 것처럼
시에 대한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죽은 시는
영원히 살아나지 않으리라
시간을 재어 보고 죽음을 계산한 세상 속에서
시의 세계는 하나의 예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죽음으로부터 그 시인의 이름도 사라져 버린다는 것과
그 예언과 다른 뱃속으로부터 불구의 시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시의 뜻을 언어의 혼돈이 덮어 버린다는 암시적 예언이다
이 예언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3
시는 그들에게 오지 않았다
시가 말을 찾아 아직 걸음을 떼기도 전에
그들은 아무 말이나 써 버렸다
언어의 먼지 속에서 그들은 죽은 말들을 담아 갔다
죽은 말들을 눈앞에 두고
그걸 볼 때마다 그들은 흔들렸다
그들이 처한 곳엔 평화도 없었다
문체의 얼이 빠져 나가 버리면
그들의 머리 속엔 창백한 불안이 현기증처럼 떠돌았고
시어들이 맥없이 시들어 버릴 때마다
그들의 갈증은 가뭄을 만났다
욕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들 마음으로
어떤 시의 바람이 불어 가고, 불어 오겠는가
시혼을 덮고 있는 어둠의 두께를
고뇌의 창으로 뚫고, 기도의 검으로 베어 낸다손
거품에다 비누방울을 부딪치고 있는 그들에게
무슨 시의 피가 돌겠는가
벽에 부딪친 재능을 가리고
그들은 언어의 혼란으로부터 현실을 두리번거렸고
세속을 즐기는 그들은 가파른 산을 오르지 못했다
얄팍한 기교와 모방에 눈이 먼 그들은
시정신의 곧음과 자기 성찰을 외면했고
오히려 육감의 상상력과 경험의 주장을 내세워
예술의 각성이 향락의 상처 후에 여과되어 열린다는 듯이
아예 거짓과 간음과 탐욕을 일삼았다
그들에겐 지성의 격식도 겉치레뿐이었다
독벌레처럼 눈알을 굴리며
그들은 쾌락의 잎을 갉아먹어 버리고
환멸의 잎맥만 남겨 놓았다
그들은 닫혀 있었다, 문을 안으로 걸고
돈과 죽은 시의 생산을 부추기며
죽은 시의 잔치를 벌렸다
그들이 넋두리로 뽑아 낸 시들은
썩은 냄새를 풍기는 그들 시대의 악덕이었다
가끔 어설픈 평론가가 나타나
그들의 시를 살리려고 흥분하며 허풍을 떨었지만
한번 죽은 시들은 도무지 살아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탁류에 휩쓸리는 그들의 시단은
허상의 제단이었다
그들의 곪은 은유는
바로 그들이 차려 놓은 상한 제물이었다
4
그들은 언어에 걸려 넘어졌다
언어를 아껴 쓰지 않았으므로 말이 죽었고
시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시인이 죽었다
참된 고뇌를 피해 다니며 그들은
허구가 입 벌리고 있는 깨어진 행운만을 바랬다
이미 죽은 시인들은
자기가 쓴 시에게 멸시를 당했다
자신의 시로부터 화살을 맞았다
시가 제 주인을 심판했다
함부로 쓴 시에는 망각의 독이 있었고
낙엽이 지듯
그 독에 중독되어 그들도 서서히 쓰러졌다
시와 시인이 다같이 넘어졌다
시의 길에서 넘어진 자여
고개를 하늘로 쳐들어라
그들은 순서도 없이 떠났다
고통과 죽음을 대물림 받은 안타까운 세상에서
덫을 놓은 자들과 덫에 걸린 자들끼리
시의 어떤 감흥도 없이 소멸했다
그들은 또 자신의 시를 부정하지 않으려다
끝내 자신까지 부정해 버렸다
제 명예를 찾아다니며 계절만 허비했다
그들의 둔한 시는 입을 다물었고
세월은 부정한 그들을 하나씩 쓸어갔다
한통속의 무리들은 그것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바람이 불 때마다 그들도 사라졌다
그들 사이에서
단 한 번도 슬픔은 고개를 숙이지도 못했다
5
죽은 낙엽의 현상에 대해 관찰할 것.
지위를 탐내며 시 없는 권력에 붙어 있는 자들과
썩은 기둥 아래 서 있는 자들을 볼 것.
최고인 것처럼 행색을 꾸미며
상류병에 쏠려 교활하게 콧대를 세우는 자들을 볼 것.
그들은 저절로 넘어졌다
권력이나 학벌, 세상에 비해 안경알보다도 작은
지류와 동문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깃발 아래서 여전히 지식의 종속을 졸업하지 못한 자들과
습관적으로 반대편을 향하여 분노하는 이기주의자들과
아첨과 부조리로 길들여진 기회주의자들이
교묘하고 간교하게 남을 헐뜯으며 불평을 늘어놓는다
도대체 그들은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때, 혀로 울려나오는 그들의 심보를 볼 것.
넉살을 부리며 속내를 감추는 정신증후군을 볼 것.
시가 아니라 시인이라는 악세사리를 너덜너덜 달고 다니며
야망을 탐닉하며 줄 서 있는 염탐꾼들과
애당초 시와는 거리가 아득한
시 밖의 대열에서 칼을 든 가짜 요리사들이
식탁 없는 낡은 창고에서 요리를 한다
겨와 재를 날리며 연기를 피운다
이미 낡고 병든 시들을 굽고 튀기고 한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며 긁어내리기를 좋아하는 자들이
벌써 숨넘어간 제 시에 취해 열을 올린다
거만하고 뻔뻔스러운 말투로
자기의 시, 맛없는 제 요리를 쳐들고 소리친다
광고에 의존하는 자들과 남의 것을 흉내내는 자들을 볼 것.
상한 글줄을 들고 텅 빈 칭찬을 기다리는 자들과
꼬리를 내리고 만족을 구걸하는 관능주의자들을 볼 것.
형편없는 시를 추켜세워 주며
제 이름이나 알리려고 알짱거리는 자들과
도사인 척하면서 수다를 떠는 위선자들을 볼 것.
시가 깊은 동굴 속에 있다고 하는 자들과
시를 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물건이라고 하는 자들을 볼 것.
마지막으로
시로부터 교만해진 자와
시로부터 자유로워진 자를 구별해 볼 것.
6
그들의 시는 호흡을 멈췄다네
그들의 죽은 시 속에서, 진실은 종적을 감췄고
아름다움은 해묵은 허수아비가 되었다네
운율의 물줄기는 말라 버렸고
자연의 생동감은 목이 비틀렸다네
죽어 있는 그들의 시 속에서
사랑은 아무렇게나 짓밟히고
신에 대한 찬미는 철문이 닫혔다네
그들에게는 신의도 미덕도 겸손도 없고
우정도 미래도 기쁨도 행복도 없고
사람을 아끼는 살가운 풍경도 볼 수 없었다네
그들의 시 예술이라는 터진 마대 속에는
시기와 욕심과 자랑과 편견과 미움과
말의 장난, 온갖 고장난 장난감들이 채뜨려져 있고
아무렇게나 뱉어 낸 문장들이 뒤엉켜 있었다네
이것들은 그들이 아끼는 허탈한 것들이라네
길 잘못 든 발걸음이 어둡고 더딘 것처럼
그들에게 시의 세상은 도리어 허망한 것이라네
그들의 말과 행위는 갈수록 어긋나고
시와 시인의 본색은 따로따로 뒤틀렸다네
그들과 그들의 시는
영영 깨어날 낌새도 안 보였지만
세월은 기척도 없이 수만 리를 지나고 있었다네
7
숲이 있었네
숲에서 죽은 나무가 되지 않기를... 시간과 사물이, 생명이
제 근원의 모습으로 좀더 가까이 다가오기를... 아, 그래도 그래도
그들은 덫이 되었네
덫이 되어 제 발목을 걸고 있었네
독초들의 아류와 귀머거리의 군상들 속으로
그들은 숨어들었네
소경이 소경의 손을 잡고
늪으로 걸어갔네
숲이 있었네
그대, 숲에서 죽은 나무가 되지 않기를…
(우이시 제19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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