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眼 / 조 영 님
시는 언어의 함축성과 생명력을 무엇보다 중시한다. 그래서 옛적의 시인들은 시어의 조탁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시안'은 바로 이러한 시어 조탁을 반영하는 이론이다. 이 말은 宋의 蘇軾의 '그대 비록 단청의 솜씨는 없으나, 시안 역시 절로 공교하여 식별한다네(君雖不作丹靑手, 詩眼亦自工識拔)'와 氾成大의 '도안은 하마 간 데 없고 시안만 남고, 매화가 피려하니 눈이 먼저 없어지네(道眼已空詩眼在 梅花欲動雪先稀)'라는 구절에 처음 보인다. 또 唐人의 시에 '공교함은 한 글자에 달려있으니 그것을 시안이라 한다(工在一字 謂之詩眼)'라 한 것이 보인다. 흔히 후대에는 한 편의 시 가운데 가장 정채하고 관건이 되는 시구를 지칭하여 '시안'이라 하였다.
淸의 劉熙載(유희재)는 <藝槪>에서 '시안이란 단지 어떤 자가 잘 되었고 어떤 구가 놀랍도록 훌륭하다는 것을 일컫는데 지나는 것이 아니라 神光이 모이는 곳이므로 전체를 관통하는 눈이 있고 몇 구의 눈도 있어서 이 眼光에 의해 비춰지지 않는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시안'은 단순하게 시어를 조탁하는 煉句煉字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 전체의 내용과 형식을 꿰뚫는 '活字, 活句'인 셈이다.
淸의 吳大受(오대수)는 <詩筏(시벌)>에서 총기가 살아 움직이는 한 구절이 시 전편을 기발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하여 '시의 명수가 시어를 다듬으면, 벽에 그린 용 그림에 마지막으로 눈동자를 찍자 비늘을 꿈틀거리며 날아오르는 것처럼 된다'고 하였으니 시안은 바로 시 전체에 생명을 부여하는 '눈동자'라 할 수 있다.
대개 시안이 있는 곳을 7언시는 제 5자에, 5언시는 제 3자에 두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唐의 岑參(잠삼)의 시에
외로운 등불은 나그네 꿈을 사르고 孤燈然客夢
찬 다듬이 소리 고향 생각을 다듬질하네 寒杵搗鄕愁
라는 구절이 있다. 위의 제 3자인 '然'이 眼字이다. '然'은 '燃'과 동의로 '불사른다'의 뜻이 된다. 객지를 떠도는 나그네가 외로운 객점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설핏 잠이 들었는데 외로운 등불만이 향수를 불태운다고 한 것이다. '然'자가 주는 적합함을 대신할 그 어떤 자도 없을 듯싶다. 마치 두보의 '강물 파랗고 새 더욱 흰데(江碧鳥逾白), 산 푸르고 꽃은 타는 듯 (山靑花欲然)'이란 구에서 '然'자를 대했을 때의 신선한 충격과 흡사하다.
또 宋祁(송기)의 '붉은 살구나무 가지 끝에 춘정이 시끄럽다(紅杏枝頭春意鬧)'에서 '鬧'자도 단련된 안자이다. 흔히 화사한 봄에 핀 살구꽃은 봄을 이기지 못하는 아리따운 처녀의 마음에 비유된다. 춘정을 이기지 못하는 마음은 마치 살구나무 가지 끝에 조잘대는 새처럼 시끄럽다고 표현한 것이다. 또 동파의 시구에 '나 이 돌멩이를 가지고 돌아가니(我携此石歸), 소매 안에 동해가 있네그려(袖中有東海)'가 있는데 '有東海'가 句中眼이다. 바닷가에서 가지고 온 조그마한 돌멩이는 바닷물의 또 다른 분신. 그러니 소매 속의 돌멩이는 그냥 돌멩이가 아닌 바로 동해! 동해가 소매 속에 들어있다니! 이런 것을 두고 妙語라고 했던가?
한편, 시어를 조탁하는 '시안'을 중시한 반면 시안을 숨길 수 있는 '藏眼'의 경지에 이를 것을 주장한 이도 있다. 明의 胡應麟(호응린)은 <詩藪>에서 '盛唐 때의 구법은 渾涵하여 兩漢의 시와 같아서 어느 한 자만으로 시의 성취를 따질 수 없다. 두보 이후로 자구 중에 기이한 자를 두어 '眼'이라 하였는데, 이러한 구법이 생김으로써 혼함함이 없어지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돌에 티눈이 있는 것을 벼루로 만들면 흠이 된다고 말하였다. 나 역시 시구 속에 티눈이 있으면 시의 흠이 된다고 생각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하였다.
땅이 탁 터져 강물에 뜬 배 모습 감추었고 地坼江帆隱
하늘이 맑게 개이자 나뭇잎 소리 들린다 天淸木葉聞
땅 낮아 황야가 드넓어 보이고 地卑荒野大
하늘 멀어 저녁 강물 더디 흐른다 天遠暮江遲
위의 시구는 각각 두보의 <曉望>과 <遣興>의 한 구절이다. 전구에서 단련이 된 眼字는 제 2자 '坼'이다. 후구에서는 안자가 없다. 호응린은 위의 두 구를 놓고 전자가 후자만 못하다고 하였다. 여기서는 시안이 있는 것이 시안이 없는, 혹은 시안을 감춘 것만 못한 것이 된 것이다. 한 편의 시를 생동감 있게 살리기 위해 조탁한 '시안'이 '티눈'과 같아서 시의 흠이 된다고 하니 참으로 재미있는 이론임과 동시에 나아가 보다 차원 높은 시 연마를 요구한 이론이라 할 수 있다. 장자의 '得魚忘筌'에 비유한다면, 고기가 시에서 추구하는 최상의 극치라면 통발은 詩眼 나아가 언어 자체인 셈이다. 고기를 얻지 못하고서 통발을 잊어서는 안 되지만 이미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자연스레 잊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언어의 조탁 혹은 언어 자체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의미로 이해된다. 또한 全篇의 시에 활기가 있게 하는 '시안'의 조탁에 힘을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나 시안을 숨겨, 단련을 많이 한 것 같으나 단련하지 않은 것 같은 자연스런 경지에 이르러야 함을 말한 것이다.
(우이시 제14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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