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의「너와집 한 채」/ 임 동 윤
사람은 누구나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처한 현실이 각박하면 각박할수록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나쁘게 말하면 현실도피이고 좋게 말하면 삶의 재충전을 위한 여유를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아니 내 삶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긴다면 모든 것 버려 두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단풍 곱게 물들고, 모든 것이 저마다의 무게로 깊어 가는 시월은 떠나고 싶은 욕구가 더욱 충만해지는 달이다. 그러나 어쩌랴, 마음먹은 대로 떠날 수 없는 것이 현실임을. 아침에 눈뜨면 마주하는 숫자와 약속된 시간과의 치열한 싸움. 이 거대한 벽 앞에서 나는 다만 마음속으로 나만의 탈출을 꿈꿀 뿐이다. 비록 몸으로는 갈 수 없지만, 나는 내 가야할 그곳의 푸른 바람소리와 물소리를, 아침마다 숲에 내리는 이슬과 그 이슬을 받아먹고 자라나는 온갖 들꽃들의 은은한 향기를 꿈꾸는 것이다. 밤이면 알별 나는 소리 속에 잠들고 아침에 깨어나면 물빛 안개와 단풍 곱게 물드는 숲에서 지줄대는 청아한 새소리가 그리운 것이다.
그때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이 김명인의 「너와집 한 채」라는 시였다. 이 시는 그의 세 번째 시집 『물 건너는 사람』(세계사)의 앞에서 두 번째로 실려 있는데 그에게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아름답고 따뜻한 시어들로 꽉 차 있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여태까지 접해왔던 「동두천」과 「머나먼 곳 스와니」의 시편들이 삶의 아픔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어서 어둡고 암울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너와집 한 채」만은 그렇지가 않았다. 한 마디로 유별난 작품이었다. 김명인도 이런 시를 쓸 수 있다니! 그만큼 이 「너와집 한 채」는 나에게 충격으로 와 닿았던 것이다.
길이 있다면, 어디 두천쯤에나 가서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의
버려진 너와집이나 얻어 들겠네, 거기서
한 마장 다시 화전에 그슬린 말재를 넘어
눈 아래 골짜기에 들었다가 길을 잃겠네
저 비탈바다 온통 단풍 불 붙을 때
너와집 썩은 나무껍질에도 배어든 연기가 매워서
집이 없는 사람 거기서도 눈물 짓겠네
쪽문을 열면 더욱 쓸쓸해진 개옻 그늘과
문득 죽음과, 들풀처럼 버팅길 남은 가을과
길이 있다면, 시간 비껴
길 찾아가는 사람들 아무도 기억 못하는 두천
그런 산길에 접어들어
함께 불 붙는 몸으로 저 골짜기 가득
구름 연기 첩첩 채워놓고서
사무친 세간의 슬픔, 저버리지 못한
세월마저 허물어버린 뒤
주저앉을 듯 겨우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토방 밖에는 황토흙빛 강아지 한 마리 키우겠네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외간 남자가 되어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
강원남도 울진군 북면
매봉산 넘어 원당 지나서 두천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겠네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네.
― 김명인의 「너와집 한 채」 전문.
김명인은 첫시집 『동두천』과 두 번째 시집『머나먼 곳 스와니』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의 바다를 줄곧 배회했었다. 낯선 도시 서울에서 30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그는 <지상의 방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다가 방배동에 꿈에 그리던 지상의 집 한 칸을 마련하고 집 근처 야산에 올라 빈 물통이나 채우는 자신의 황량한 미래를 바라보게 된다. 그때, 그는 <아직 집이 없으므로 절망의 둥지는 틀지 않고 다만 자유롭게 서성거리는 칼새(시집 『물 건너는 사람』「칼새의 방」)를 부러운 눈으로 보게 된다. 이렇듯 김명인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또다시 자기 모색의 <길 찾기>에 나선다.
너와집은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산 속의 버려진 집이다. 그냥 읽으면 복잡하고 험난한 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아무 거리낌없는 그곳에서 정착할 뜻으로 읽히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정작 정착의 의지는 소망일 뿐, 실제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그가 살아온 지난날들은 <사무친 세간의 슬픔>이고, <저버리지 못한 세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견고한 그의 집을 결코 허물 수가 없는 것이다. 허문다는 것은 지금의 그의 생활과의 완전한 결별을 뜻한다.
또한 김명인은 너와집에 가서 실제로 산다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상상으로서의 너와집을 꿈꾸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주저앉을 듯 겨우 겨우 서 있는 저기 너와집>, <부뚜막에 쪼그려 수제비 뜨는 나 어린 처녀의 / 외간 남자가 되어>에서 보면 적극적으로 너와집의 주인으로 살기보다는 그 집의 외간 남자가 되어 황홀한 연애를 꿈꾸고 있는 셈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너와집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못한다. <아주 잊었던 연모 머리 위의 별처럼 띄워놓고 // 그 물색으로 마음은 비포장도로처럼 덜컹거리겠네>라고 그는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고 있다.
김명인은 늘 새로운 곳으로의 탈출을 꿈꾼다. 따라서 너와집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탈출, 혹은 또 다른 <길 찾기>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오브제로 택한 <너와집>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서 소망으로나마 가 닿고자 하는 서러운 그리움의 처소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너와집을 쉽게 갈 수 없는 아주 깊은 산 속에 설정한다. 그러면서 그는 또 쉽게 갈 수 없는 만큼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는 곳이라고 말한다. <따라오는 등뒤의 오솔길도 아주 지우고> <마침내 돌아서지 않겠>다는 것이다.
위의 시처럼 나는 날마다 이 숨막히는 현실에서의 탈출을 꿈꾸고 있다. 그것이 상상으로만 끝나는 일일지라도. 그러나 이 상상만큼 신나는 일도 없다.
이 가을, 너와집 한 채를 짓기 위해 아직은 자연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강원도 영월이나 평창, 아니면 정선쯤으로 먼길 떠나야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비록 상상으로만 만나는 그리움의 길일지라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일이므로.
(우이시 제1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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