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이생진의 <무명도> / 박찬일

운수재 2007. 11. 9. 06:02

 

 

 

이생진의「무명도」/  박 찬 일

 

 

이생진 시인의 시집 [우도]는 발로 쓴 글들(시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시 「무명도」(우도)는 이렇다.

 

저 섬에서

한 달만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뜬눈으로 살자

저 섬에서

한 달만

그리운 것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자

 

발로 쓴 시! ‘구체적으로’ 가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시! 누가 ‘천박한 경험주의’라고 했는가. 아, 아름다운 경험이여, 경험주의여! 나도 보고 싶다. 가보고 싶다. 나도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우도에 가 있고 싶다. “한 달만” ‘그와 함께’ 우도에 있고 싶다.

‘사랑의 시’라고 했을 때 이 시는 두 가지로 읽힌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을 뭍에 두고 ‘우도’에 혼자 와 있는 경우다. 그는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한다.’ 둘째,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도에 함께 와 있는 경우다. 그들은 그리움이 없어질 때까지 “뜬눈으로 살”고 있다. 뜬눈으로 사랑하고 있다. 뜬눈으로 24시간을 보내는 연인들, 서로의 눈부처를 바라보며, 뚫어질 듯 바라보며, 잡아먹을 듯 바라보며, 앉아서 서서 누워서!

수용미학에서 자주 쓰이는 말로 ‘생산적 오류’라는 말이 있다. 창작미학상 사실이 아닐지라도 독서자가 다르게 해석하여 시 해석의 지평을 넓히는 것. 두 번째 해석이 아마 그런 경우에 해당되리라.

이 시는 다시 말하지만 ‘구체적으로’ 가본 자만이 쓸 수 있는 시다. 발로 쓴 시다.

그런데 '우도'에는 정말 「발로 쓴 글」이란 시가 실려 있다.

 

우도 해안선 사십 리 길

손은 걷고

발은 글을 쓴다

발로 쓴 글

읽어보니

고린내 난다

 

손으로는 글을 쓰고 발로는 걷는다. 그러나 시인은 “손은 걷고/ 발은 글을 쓴다”고 했다. 반어(反語)다. 반대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이 왜 걷지 못하는가.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가는 것도 걷는 것이다. 왜 발로 글을 쓰지 못하는가. 우리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글을 보고 흔히 ‘발로 쓴 글’이라고 하지 않는가. “손은 걷고/ 발은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러므로 역설이기도 하다. ‘역설’은 반대되는 상황이, 혹은 상식의 맥락에서 벗어난 상황이 제시될 때 일컫는 수사법의 일종이지만, 그러므로 반어의 범주에 속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반대되는 상황을 해소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의 상황’에서는 반대되는 상황, 혹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상황, 그럴 법하지 않은 상황이 어울릴 것 같은 상황, 그럴 법한 상황으로 해소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파우스트󰡕), 라는 말은 반어이면서 역설이다. 인간은 노력하면 할수록 방황하지 않을 것 같은데 노력하면 할수록 방황한다고 했으니 반대로 얘기한 것이다. 반어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반대로 얘기한 것이 아니다. 사실대로 얘기한 것이다. 인간은 노력하면 할수록 정말 방황하게 되기 때문이다. 알면 알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이 눈에 띄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의 상황, 모순의 상황이 해소되었으므로 이제 ‘역설’이다. ‘반대의 상황’이 해소되지 않으면 반어의 범주로만 남아 있게 되지만 ‘반대의 상황’이 해소되면 역설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생진 시인은 중세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시인인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세르반테스 같은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동키호테가 가는 길은 세르반테스가 간 길이기도 하였다. 즉 동키호테의 모험은 세르반테스의 모험이기도 하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간다. 지하철을 타고 간다. 기차를 타고 간다. 택시를 타고 간다. 혹은 비행기를 타고 간다. 우리는 ‘갈 때’ 대부분 걸어가지 않고 타고 간다. 타고 가는 동안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은 ‘탈 것’ 안의 것에 제한되어 있다. ‘탈 것 밖’의 것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겠지만 제한되어 있다(절대로 만질 수는 없다). 무엇보다? 걸어가는 것보다! 걸어갈 때보다! 예를 들어 택시를 ‘타고’ 가면서 ―제일 나쁜 경우는 밤에 총알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일 것이다― 산적을 만날 수 있는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볼 수 있는가. 샘물 한 모금 손바닥으로 떠서 마실 수 있는가. 내려온 나뭇가지의 이파리들을 짐짓 손으로 훑을 수 있는가.

 

이생진 시인은 산적을 만나는 시인이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는 시인이다. 샘물 한 모금 손바닥에 떠서 마시는 시인이다. 내려온 나뭇가지의 이파리들을 짐짓 손으로 훑어내는 시인이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말 ‘탈 것’이 별로 없던 중세 시절의 삶을 사는 시인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이생진 시인을 ‘섬의 시인’이라고 하는데 섬에 잘 가기 때문에 섬의 시인이겠는가. 택시 타고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배타고 섬에 잘 가기 때문에 섬의 시인이겠는가. 아니다. 섬에 ‘있기’ 때문에, 섬에 존재하기 때문에, 섬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섬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섬에서 시인은 ‘타고’ 다니겠는가. 걸어다니지 않겠는가. 섬에서 걸어다니기 때문에 섬의 시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지에서는 보지도 못한 것이 얼마나 많을 텐데. 얼마나 다른 것이 많을 텐데. 정말 신기하고 진기한 것이 얼마나 많을 텐데. 이생진 시인은 그것들을 보고 다니기 때문에 섬의 시인인 것이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섬의 시인인 것이다. ‘이상한’ 일을 겪기 때문에 섬의 시인인 것이다. ‘중세’의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중세’의 이상한 일을 겪기 때문에 섬의 시인인 것이다. 이생진 시인은 모험의 시인, 중세의 모험의 시인, 아, 걸어 다니는 시인, 그의 시에서 “고린내”가 나는 시인이다.

                                                                                                         (우이시 제16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