牧隱 李穡 / 조 영 님
李穡(1328~1396)은 고려말의 대학자이며 시인이다. 그의 자는 潁叔이며 호는 牧隱이다. 고려말 圃隱 鄭夢周, 陶隱 李崇仁과 함께 三隱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집인 『牧隱集』은 55권이 전하고 있는데 시가 6천여 수가 실려 있으니 그 양만 해도 고려에 있어 으뜸이다. 이색의 문장은 넓고 여러 체를 두루 구비하고 있어 무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일찍이 권근은 그의 시를 평하여 이르기를 ‘뜻이 피어나 문장을 구사한 것은 넉넉하여 여유가 있고 온후하면서 끝이 없다. 천지의 精英을 타고나서 구양수나 소식의 수레를 몰아 한유나 유종원의 집에 들지 않고서야 여기에 이를 수 있겠느냐. 우리나라가 있어온 이래 선생보다 풍성한 이는 없었다’라고 극찬을 하였다. 명나라 사신 許天使가 우리나라의 문집을 찾았을 때 이규보, 김종직, 서거정, 목은 등 여러 분의 문집을 보였더니 단연 ‘목은집’을 뽑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한다.
이색은 고려 말에 예문관 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도전, 권근, 변계량, 이숭인 등 당대 명사들을 배출하여 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이 건국되자 한산부원군에 봉하여지고 이성계의 출사 종용을 받지만 끝내 거부한다. 이색은 이성계와 군신관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친구의 예로 대할 뿐 拜禮하지는 않았다. 그는 여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출처분명(혹자는 정도전이라 함)의 下賜酒를 마시고 급사했다고 하는 의문을 남기고 갔다.
목은은 시를 지을 때에 속담과 우리의 풍속에 대하여 지은 것이 많은데 이로 인해 시가 비속하다는 평을 많이 받는다. 예컨대 ‘낮 말은 새가 전하고 밤 말은 쥐가 전한다.(雀晝傳言鼠夜傳)’, ‘식구가 느는 것은 몰라도 주는 것은 당장 안다. (添不曾知減却知)’, ‘밭전자로 된 창문이 입구자로 된 뜨락을 내려다본다. (田字窓臨口字庭)’, ‘평계자는 참으로 널빤지 같구나. (平桂眞如板)’와 같은 것이 그러하다. 여기서 평계자는 꿀떡으로 밀가루에 꿀을 섞어 반죽하여 얇게 밀어 만든 것이니 넓이가 반 치쯤 되고 길이가 두세 치쯤 되게 잘라서 참기름에 지진 것을 평계자, 또는 과자라고도 하여 초상이나 혼인 잔치 등 큰일 때에 약 1척쯤 되게 쌓아 놓곤 했다 한다. 이것은 대개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풍속이라 한다. 또 민속명절인 동지날에 팥죽을 쑤어 서로 나누어 먹는 풍속이나 정월 대보름에 찹쌀밥을 짓고 과실과 벌꿀을 섞어 만든 약식을 서로 나누어 먹는 풍습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없어도 중국 시인이 노래한 것이라면 적극 시의 소재로 썼던 당시의 창작 관례를 따른다면 이렇듯 우리의 속담과 풍습을 노래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조선후기 우리 것을 찾자는 자주적 문학관과 맥이 닿아 평가절하될 수 없게 된다.
이색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실려 전하는데 대략 이러하다.
이색이 중국에 건너가 과거를 보아 장원으로 당선하게 되자 중국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다. 한번은 어느 절에 갔더니 그 절의 중이 맞이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고려의 선비로서 중국에 와서 과거에 장원을 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이렇게 뵈오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고 하면서 떡을 가지고 와서 대접을 하였다. 그리고 시 한 구절을 짓기를 ‘승소가 조금 밖에 나오지 않으니, 중의 웃음이 적다(僧笑少來僧笑少)’라 하면서 이색에게 대구를 채우라고 하였다. 僧笑는 떡의 다른 이름이다. 이색은 갑자기 대구를 채울 수가 없어서 사과하고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 다음에 와서 다시 대구를 채우겠다’고 했다. 그 뒤에 어느 곳에 묵게 되었는데 주인이 병 하나를 들고 오길래 ‘무엇이오’라고 물었더니 주인이 말하기를 ‘客談’이라고 했다. 客談은 곧 술의 별명이다. 이 말을 들은 이색은 기뻐 당장 지난번 채우지 못한 시구에 대하기를 ‘객담이 많이 오니 객담이 많게 되었구나(客談多至客談多)’라 하였다. 반 년만에 그 중을 찾아가서 그 사연을 이야기하니 중이 칭찬해 말하기를 ‘대구를 채우는 것은 꼭 맞게 채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니, 조금 늦은 것이 무엇이 나쁘겠는가? 다만 한 구를 묘하게 채워 가지고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이렇게 와서 알려주시니 더욱 감사할 뿐이다’라고 했다 한다.
이제 이색의 대표작으로 널이 애송되는 「昨過永明寺」를 감상하여 보자.
어제 영명사를 지나다가 昨過永明寺
잠깐 부벽루에 올랐네 暫登浮碧樓
텅 빈 성에는 한 조각달이 걸려 있고 城空月一片
늙은 돌 위엔 구름도 천추나 되었네 石老雲千秋
기린마 떠나가 돌아오지 않으니 麟馬去不返
천손은 어느 곳에서 노닐고 있는가? 天孫何處遊
바람부는 섬돌에 기대어 길게 휘파람 부니 長嘯依風磴
산은 푸르고 강물 절로 흐르네 山淸江自流
영명사는 평양에 있는 것으로 그 동쪽에는 부벽루가 있다. 시인은 일부러 부벽루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영명사를 지나다가 잠깐 들른 것이다. 그곳에서 지나간 역사를 회고하며 그 감회를 읊고 있다. 텅 빈 성에 걸려있는 한 조각 달, 늙은 돌,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무상한 구름은 회고하기에 적합한 제재들이다. 이어서 옛 도읍의 땅 평양에서 기린마를 타고 하늘로 올랐다는 초인적인 임금의 행적을 연상하고 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임금으로 섬기기를 거부하였던 이성계와 기린마를 탄 임금과 대비시키고 있다.
이색의 시를 두고 호방한 장부의 기개가 넘쳐흐른다고 하는데 조선후기 申緯는 바로 이 시가 그러하다고 하였으며 허균의 『성수시화』에서는 ‘조식도 하지 않고, 지나치게 애도 쓰지 않았으나, 우연히 음률이 맞아서 읊으면 정신이 시원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 시의 부벽루는 단순히 소재 이상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시에서 흔히 소재를 제시하고 그 소재의 주변 이야기를 끌어들여 독자로 하여금 어떤 감정을 유도해 내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이 시는 부벽루라는 소재를 제시하고 대뜸 시인의 감정을 먼저 폭로함으로써 독자가 더 이상 개입할 수 없게 직선적인 표현법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면이 이 시를 ‘호방’하다는 평을 받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제 「對菊有感」이란 시를 한 편 더 감상하여 보자.
인정이 어찌 무정한 물건과 같겠는가? 人情那似物無情
부딪히는 곳마다 점점 불평스럽기만 하네 觸境年來漸不平
우연히 동쪽 울타리 향해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함은 偶向東籬羞滿面
진짜 국화를 가짜 도연명이 마주보고 있는 탓이다. 眞黃花對僞淵明
시인은 부딪히는 곳마다 불평이 심해 인정이 차라리 물정만 못하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세상에 떳떳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진짜 국화를 바라보는 가짜 도연명으로 보고 있다.
이색은 정몽주가 피살된 후 이와 관련되어 여러 차례 두 아들 종학, 종선과 함께 귀양을 가게 된다. 그리고 조선의 개국 후 한산부원군에 봉함을 받는다. 이것은 이색에게 있어 조선왕조를 섬겼다는 오점을 남기는 결과가 되고 만다. 아마도 이러한 와중에 복잡하게 얽힌 세상사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가고픈 귀거래의 심정을 이 시에 표현한 것이리라.
(우이시 제15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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