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레이크의「천진난만의 노래」서곡 / 김 동 호
야생의 골짜기 피리 불며 가다가
즐거운 환희의 노래, 피리 불며 가다가
나는 구름 위에 아이를 하나 봤네
아이는 웃으며 내게 말했지
"羊의 노래 한번 불어볼래"
나는 기꺼이 양의 노래를 불었지
"그 노래 한번 더 불어줄래"
나는 같은 노래 다시 불었지
아이는 너무 좋아 울었네
"피리, 즐거운 네 피리 내려놓고
이번엔 입으로 그 노래 한번 불러볼래"
나는 입으로 그 노래 불렀지
아이는 너무 좋아 또 울었네
"얘야 이제 앉아서 그 노래 글로 써줄래.
다른 아이들도 다 듣고 좋아하도록"
그 말을 하고 아이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네
나는 빈 갈대를 꺾어 서툰
펜을 만들고 맑은 물을 찍어
나의 행복한 노래를 책으로 썼네
세상 모든 아이들이 읽고 좋아하도록
―윌리엄 불레이크 「천진난만의 노래―서곡」
가장 작은 이야기로 가장 큰 이야기를 한 시. 가장 보드라운 말로 가장 강한 말을 담은 시. 가장 적은 말로 가장 많은 말을 한 시. 시의 본질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시의 생명․힘․아름다움 또한 이런 순수역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쌩떽쥬베리의 『어린 왕자』가 그렇고 에밀리 디킨슨의 『구축함』이 그렇고 워즈워스의 「무지개」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게 하는 시가 이 시이다.
여기서 '야생'의 골짜기는 단순한 야생이 아니다. 때묻지 않은 본래의 세계, 에덴의 동산 같은 것이다. 순수무구한 아이가 만나는 첫 세상은 경이이며 열락이며 지선의 순백이다. 가장 낮은 유아의 자리이면서 가장 높은 성자의 자리,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하는 그 자리이다. 그 자리에선 자연뿐 아니라 초자연도 만나게 된다. 해서 아이는 구름을 타고 앉은 神仙을 만난 것이다. 그 신선은 相對 自在의 신선으로 아이를 만나면 아이가 되고 어른을 만나면 어른이 되는 신이다. 아이를 만나 아이의 소리로 통혼하는 모습을 좀 보자. 소리의 톤이며 결이며 울림이며 흐름이 그야말로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대화이다. 그러나 깊고 깊은 이야기를 내비쳐주고 있지 않는가. 시가 무엇이며 왜 시를 써야 하며 시는 어떻게 써야 하는지 이러한 큰 이야기들이 티없이 맑은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시론이란 이처럼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2연에서 시인은 시의 주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양이 주제이다. 대문자로 쓰는 양(Lamb)은 예수를 가리킨다. 불레이크는 개방적인 기독교인이었으니까 여기서의 양은 천지 만물의 근원, 所以然 같은 것이라 해도 좋으리라. 이 세상 근원에 대한 찬미, 그것이 시라고 그는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찬미의 노래가 너무 좋아 구름 위의 아이는 한번 더 듣기를 청한다. 땅 위의 아이는 다시 들려준다. 구름 위의 아이는 너무 좋아 운다. 근원자에 대한 확신이 이보다 더 순박하게 표출될 수가 있을까. 3연에서 구름 위의 아이는 다시 청한다. 이번엔 피리를 내려놓고 육성으로 그 노래를 들려달라고 한다. 아무리 피리가 좋다고 해도 그것은 간접이다. 직접 하느님의 악기인 인간의 몸을 통해, 성대를 통해 들려달라고 한다. 여기서 육성은 단순한 육성이 아니다. 인간의 머리와 가슴이 다 동원된 혼의 육성, 詩이다. 때문에 그 혼의 육성을 들은 구름 위의 아이는 너무 좋아 다시 울며 이번엔 그 노래를 글로 써줄 것을 청한다. 혼자서 듣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노래, 세상 아이들과 함께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을 남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아이, 그 아이의 마지막 청을 시인의 숭고한 소명이라 봐도 좋으리라. 詩作의 동기를 이렇게 순수하게 밝힌 시인을 나는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를 쓰는 자세,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하고 멋이 있는가. 속이 빈 갈대로 펜을 만들어 맑은 물을 찍어 시를 쓴다. 속이 가득 찬 욕심의 펜이 아니다. 선입견이나 색안경의 잉크로 쓰는 시가 아니다. 사심 없는 맑은 마음으로 쓰는 시, 물과 같은 시이다. 때문에 이렇게 쓴 시는 자연히 더럼을 씻어줄 수 있는 시이고 진심과 선의가 교통하는 시이고 새롭게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시이다. 이 얼마나 작은 몇 줄로 큰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러나 이러한 장황한 해설이나 분석으로 이 시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넉두리가 시의 본 모습에 상해를 주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리고 위의 우리 말 해석도 이 시의 옳은 감상을 오히려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시의 번역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나는 가끔 한다. 뜻의 옮김은 어느 정도 될 지 모르지만 물처럼 공기처럼 흐르는 시의 율, 시의 결을 다른 언어로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마치 바다 생선을 육지의 물로 깨끗이 씻을 경우 고기의 살이 은연중에 죽고 마는 것처럼 맥빠진 다른 것을 잡기가 일수이기 때문이다. 해서 위의 시처럼 평이한 시의 경우에는 원어로 읽고 감상하는 노력을 권해보고 싶다. 그 순진무구한 숨결이며 물 흐르듯 흐르는 문체의 흐름은 그렇게 밖엔 달리 맛볼 길이 없기 때문이다.
(우이시 제16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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