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원금 만원의 의미
박석무 (전 국회의원, 전 학술진흥재단 이사장)
지난 59년, 까까머리 고등학생으로 계림동의 벚꽃동산에 신입생이 되면서, 1학년 5반의 학급담임이자 국어를 담당하셨던 분이 유공희(柳孔熙) 선생님이었다. 헤어스타일은 올백으로 넘기시고 두꺼운 안경테의 학자풍 선생님, 그처럼 박식하고 달변이었지만 말씨는 혀 짧은 소리를 내셔서 처음엔 그렇게 친숙하게 느껴지지 않던 분이셨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그 분의 말씨에 익숙해진 우리 소년들은 그 분의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과 소설적인 화술에 매료되면서 말씀 한마디 흘러 넘기지 않고 꼬박꼬박 경청하는 수업시간을 보냈다.
1반부터 7반까지 1학년 모든 학생들이 그 분의 국어수업을 받았는데, 우리 반은 담임까지 겸하고 계셔 아침의 조회나 저녁의 종례시간까지 그 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다. 교과서 진도는 제쳐 놓고 문학∙철학∙역사에 관한 온갖 지식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셨다.
예를 들면, 그 때 우리가 배우던 교과서에는 노천명의 수필 ‘겨울날’이나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며’ 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는데, 수필의 내용만을 설명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노천명의 모든 작품을 분석 검토해 주시고, 그 작품 세계에 대하여 장장 몇 시간 동안 가르쳐주시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분은 국내 소설가로 특히 이효석을 좋아하셔서 그 분의 소설을 모두 독파하셨기에 하나하나를 낱낱이 소개하고 설명하면서 우리 소년들을 이효석의 소설 속으로 빨려 들게 하였다. 그때의 교과서에는 ‘메밀꽃 필무렵’ 이라는 이효석 작품이 수록된 바도 없는데, ‘낙엽을 태우며’ 라는 교과서 속의 수필에 대한 설명보다 그 소설 설명에 몇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상하게 설명하시던 모습이 역력하다.
외국의 작가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모파상에 탐닉하였던 분인데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여인들’이라는 소설과 모파상이 ‘비계덩어리’ 및 ‘여자의 일생’ 등에 대하여 그 소설을 읽은 적이 없는 우리들에게 읽는 것보다 더 내용을 정확하게 기억하도록 반복 설명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16~17세의 감수성이 가장 예민하던 우리들에게 신들린 것처럼 작가들의 작품세계를 낱낱이 분석 검토해 주시고, 비평까지 곁들여 말씀해주시던 그분의 뜨거운 정열을 40년이 다 되는 오늘에도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59년 한 해야말로 어린 우리들이 문학에 눈을 뜨고 귀가 열리던 한 해였으며, 그렇지 않아도 문학소년이기 십상인 우리들에게 모두가 시인이나 수필가가 된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셨던 생각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오늘의 우리 시대에 큰 시인이 되어 있는 조태일 시인이나 국문학자 임형택 교수가 시를 쓰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던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고, 내가 수필 따위를 끄적이기 시작한 것도 그 때부터의 일이었다.
60년은 4∙19가 일어난 해인데, 3월 초에 학년이 바뀌고 학급이 바뀌었으나 정말 다행스럽게도 유 선생님이 또 다시 우리 반의 담임이 되셨다.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선생님은 우리 반에 들어 오시지도 못하고, 전근발령 나시고 말았다. 그때의 서운함, 애틋함, 아까운 생각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학급에 들어오시기를 학수고대하던 우리 반 학생들 몇몇이 선생님 댁을 찾아갔더니 그 날은 서울로 이사 가기 위해 짐을 꾸리고 계셨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는 서운한 마음을 이기고 선생님 짐을 챙겨드렸다. 그 다음 날 기차로 떠나는 선생님을 환송하기 위하여 광주역까지 나가 우리들 몇이 기차표를 끊어드리고, 플랫폼에서 떠나가는 선생님과 기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것으로 이별의 긴긴 세월을 맞아야 했다.
서울고등학교에 근무하시던 무렵, 우리는 옛정을 못 잊고 몇 차례 서신을 올려 안부를 살피었고, 선생님께서는 답신으로 순박한 시골의 우리들이 그립다고 격려의 말씀을 주시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무상하여 4∙19가 일어나고, 5∙16이 터지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뿔뿔이 헤어져야 했고 선생님과의 인연도 끊기고 말았다. 간간이 들리는 소식으로 서울고등학교도 그만두시고 학원에 나가며 모 대학 강사로도 출강하신다는 말이 있었으나, 정확하게 연락처 하나 모르고 세월만 흘러가고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우리들은 한일회담 반대의 6∙3 사태에 휘말리고 3선 개헌 반대에 앞장서느라 문학도 잊고 독재와 싸우고 민주주의를 외쳐대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학교를 마친 뒤에는 흉포한 유신시대를 맞아 직장에서 쫓겨 나고 감옥을 들락거리면서 인간이 지니는 애정을 회복하지 못하고 지냈다.
88년에야 나의 서울 생활이 시작되면서 잊었던 향수가 되살아나듯 나는 선생님을 기억해 내고, 선생님 소식을 찾아 나섰다. 친구들을 통해 선생님 전화번호를 알아냈으나, 그 해는 또 너무나 바빠 전화 한 번 올리지 못하고 넘기고 말았다. 선생님께 배운 노천명의 시 ‘사슴’의 싯귀처럼 ‘잊었던 향수’는 끝내 잊혀지지 않고 그 다음해에야 선생님과의 통화가 가능하였다. 이름을 말씀 드렸더니 ‘자네가 그 때 우리 반 반장이 아니었던가. 요즘 TV를 통해 우리 부부는 자네 자주 보면서 매우 반가워하고 있네’ 라고 너무도 생생히 기억하면서 자상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10대 소년들의 가슴을 문학적 정서로 가득 채워 주셨고 마음은 언제나 고동치듯 만들어주셨던 선생님. 전화로 통화한 1년쯤 뒤에야 겨우 선생님을 찾아 뵐 수 있었다. 몇 차례 전화를 올려 식사나 한번 모시겠다고 했지만 끝내 사양을 하시는 바람에 뵙지 못하다가 어느 추석 무렵 바쁜 짬을 내서 묻고 물어 역촌동 변두리의 선생님 댁을 찾았다. 70 넘은 노부부, 말 솜씨도 쇠잔한 늙은이 모습이었다. 사모님도 참 많이 변하셨으나 쇠고기 몇 근을 사가지고 갔더니 무엇 하러 이런 걸 가지고 왔느냐고 역정을 내시던 모습은 젊은 시절의 모습과 변함이 없었다.
노쇠한 사모님이 끓여 주신 커피를 마시고 나서 차곡차곡 챙겨 놓은 옛날 앨범들을 보여주시는데 우리들과 함께 촬영하였던 학급사진도 그대로 보관하고 그때의 기억들을 전혀 잊지 않고 계셨다.
기억에도 생생한 선생님의 수업시간을 상기하면서 진지한 대화를 마치고 떠나올 때는 초라하기만 한 주택의 모습에서 그 박식한 문학적 지식에 비해 너무 간소한 삶이 조금은 비애스러웠다. 옳고 곧게 사는 삶, 진정한 문학인의 모습이지만, 약간은 마음이 편치 못했다.
지금도 우리 고등학교 동기들의 모임은 계속된다. 모임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회상하게 되면 화제의 주인공은 언제나 모두가 잊지 못하는 유공희 선생님이다. 며칠 전에도 우리들은 그분의 이야기로 꽃을 피운 적이 있다. 93년 6월 국회의원 후원회를 만들었는데 그때 소식이나 알고 계시라고 문건을 보내드렸더니 선생님은 한 달도 거르지 않고 충분치 못한 생활비에서 꼬박꼬박 1만원씩을 온라인을 통해 후원 비로 보내고 계신다. 그러실 필요가 없다고 몇 번을 전화로 말씀 드렸지만 당신이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니 관여 말라고 하시며 오히려 액수가 적어 부끄럽다고만 하셨다.
40년 전의 은사께서 잘 하지도 못하고 은공도 제대로 갚지 못한 정치인 제자에게 지성스럽게 정치후원금을 보내주시고 계시니 이 돈은 어떤 돈인가? 제자의 정치생활을 감시하는 후원금이요, 문학적 정서를 잊지 말라는 뜻이며 스승을 기억하라는 매서운 회초리로 여겨져 마음의 부담이 너무도 크다.
이제 옷깃을 여미고 선생님의 마음을 읽어본다. 참으로 감동 어린 글을 쓰신 것을 보여주셨는데 문학과 정치를 함께 하라는 뜻이 담겼고, 고등하교 1학년 시절 청순한 문학소년의 마음을 버리지 말라는 충고의 후원금이 아닐지.
속된 정치에서 벗어나 더 도덕적이고 더 개혁적이고 더 전문적인 정치인 생활을 하라는 혹독한 선생님의 교훈이 그 후원금 속에 담겨 있으리라 믿고 선생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겠다. 그래서 오늘도 잊지 못하는 분이 유공희 선생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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