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는 누구인가

인생은 유수인가 / 양성철

운수재 2007. 11. 8. 07:22

[회고담]

인생은 유수(流水)인가

―유공희 선생님을 기리며

                                                                                                                                      양 성 철

 

2008년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반세기다. 나이로 따지면 지천명(知天命)이다. 요새는 내가 아직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한다. 고마운 사람들도 수 없이 많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지도 오래다. 부모님의 고마움을 제대로 느끼고 그 사랑의 티끌만큼이라도 보답할 수 있도록 내가 제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이미 고인이 되신 이 안타까움을 어떡할 것인가? 이 죄과는 바로 내 아들딸로부터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인가? 강물처럼 우리 삶도,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가? 인생도 사랑도 유수(流水)인가?

 

고교시절 선생님들도 거의 대부분 이제 고인이 되셨다. 가까이 지냈던 고교 동창친구들도 어느덧 몇몇이 벌써 이 세상을 떠났다. 50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물론 시간은 객관적 기준이자 주관적 인식이다. 로마 교황이나 서울역 지하도 한 구석에 움 추리고 앉아 있는 헐벗은 노숙자나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이다. 이 전자혁명, 지식혁명 시대에 하루가 눈코 뜰 새도 없이 숨 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이라지만, 동해바다 고기잡이 간 남편을 석 달 열흘 손꼽아 기다리는 그 어부 아내에겐 문자 그대로 일각이 여삼추(一刻 如三秋) 아닌가.

 

고교시절을 되돌아보니 조회시간 장준한 교장선생님이 떠오른다. 그분은 멋있고 인자한 인상을 나에게 남겼다. 그 뒤를 이은 목포고 교장 하시다 우리학교로 오신 임종대 선생님의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 말씀도 문득 떠오른다. 임 선생님이 서울서 경복중학교를 다닐 때 같은 하숙집에 같은 학교 다니는 학생이 있었는데, 임 선생은 당시 학교 야구선수로 운동하느라 하숙방에서 거의 공부할 시간이 없었으나 그 학생은 밤이고 낮이고 하숙방 책상에 앉아 하숙주인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서 맨날 운동만 하던 그는 부끄러워서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고. 그런데 여름방학이 끝나고 서울 하숙집에 돌아왔더니 그 학생이 보이지 않아 주인에게 물었더니, 낙제를 해서 그만 안 돌아 왔다는 이야기였다. 지금 기억으로는 놀 때는 열심히 놀고, 공부할 때는 또 열심히 해야지, 맨날 책상에 앉아 붙어서 공부만 한다고 공부 잘하는 것은 아니라고 훈계하셨던 것 같다.

 

동창 친구들도 같은 생각이겠지만, 고교시절 우리에겐 너무나도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던 것 같다. 장홍종 수학 선생님이 자기 이름의 0字를 밖으로 내놓은 0(자+호+조)를 흑판에 써가며 열심히 대수(algebra)를 가르치시던 모습이 아직도 내 머리에 아른거린다.

 

키가 유난히 작으셨던 김정 서양사 선생님이 전남여고인가 광주여고인가 여학교 교사를 오래하셔서, 여학생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서인지 학생을 보지 않고 항상 교실 천장만을 쳐다보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자의 성기(男根)를 숭상하고… 하시던 해학을 곁들인 명 강의도 생각난다. 돌이켜보니 아마 옛날 이집트나 그리스에서 성행했던, 지금도 중동이나 유럽에서 자주 마주치는, 방첨탑(obelisk) 이야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미국 워싱턴의 초대 미 대통령을 기리는 워싱턴 모뉴먼트나 북한 김일성 70세 생일 기념으로 세운 주체탑 도 방첨탑의 일종이다. 다빈치 코드 소설로 돈 방석에 앉은 미 소설가 덴 브라운은 이 소설에서 파리의 1,000피트 에펠탑이 프랑스 인의 남근을 상징(phallic symbol)한다고 비꼬는 대목도 같은 맥락이다.

 

국사를 가르치셨던 백발의 김길 선생님도 생각난다. 김길 선생님을 생각하면, 어딘가 전형적인 노학자 같은 모습이 내 머릿속 어느 깊은 구석에 아직도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서글서글하시고 남자다운 풍채가 역력하셨던 박원복 체육 선생님도 잊을 수가 없다.

 

3학년 담임선생님인 박준철 선생님은 기하를 가르치셨지만 기하를 내가 잘못해서인지 공부시간의 기억은 거의 없고, 지금 생각하면 나를 좀 좋아하셨던 것 같고, 특히 대학 입학원서를 쓰는 과정에서 나에게 좋은 조언을 해주시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박 선생님이 서울로 오셔서 휘문고에서 교장까지 하신다는 소식을 번번이 듣고도 한번도 찾아 뵙지 못해 큰 죄를 진 것만 같아 마음이 무겁다.

 

우리 영어를 가르치셨던 이종수, 하광호, 이종은 선생님들도 우리에게 과분할 정도로 특출했던 것 같다.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 에드가 알란 포우(Edgar Allan Poe,1809-1849)의 詩 ‘안나벨 리(Annabel Lee, 1849)나 미대통령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 의 그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Address at Gettysburg, 1863년 11월 19일)를 줄줄 외우고, 영국 찰스 렘(Charles Lamb, 1775-1834)과 그의 누이가 쉽게 쓴 셰익스피어 이야기(Tales from Shakespeare, 1807)도 읽었으니, 선생님들이 우리 동창생들 모두에게 영어에 눈을 뜨게 하시고, 세상을 넓게 바라다볼 수 있는 시야도 열어 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이 나는 고등학교시절을 회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선생님이 유공희 선생이다. 아마 다른 동창생들도 비슷한 마음을 갖고 있는 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어도 말이다. 국어시간이면 아마 유공희 선생님의 그 재미있고, 즐겁고, 뭔가 표현할 수 없는 멋진 자연스러움. 그의 솔직하고 직설적인 웃음거리에 흠뻑 취해서인지 나도 고교시절에는 詩에 눈이, 마음이 쏠렸다. 그 누구보다도 아마 유 선생님의 영향이 음으로 양으로 내게 그런 어린 시절 시적 낭만을 안겨 준 것도 같다.

 

나는 남모르게 시 습작도 많이 했었다. 계림동 책방에서 시집을 꽤 많이 사서 모았었다. 욕심으로는 한국 시인들의 시집을 모두 모아야겠다는 야심찬 계획도 혼자서 마음속으로 세워 놓고, 김소월, 박목월, 이상화, 이육사, 신석정, 윤동주, 한용운…등 시집을 밤이 깊도록 읽으며 홀로 야릇한 느낌을 만끽하기도 했다. 특히 신석정, 윤동주, 한용운의 시가 내 가슴을 가장 뭉클하게 했었던 것 같다.

 

당시 ‘학원’이라는 학생 월간지에 내가 습작한 시를 보내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행여 내 시가 실리지나 않을까? 하고 마음조리고 애태우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나 실리는 영예(?)를 한 번도 얻지 못하고 고교시절을 마감했다. 당시 우리 친구들의 시가 다른 학교에 비해 ‘학원’ 잡지에 유난히 많이 실리는 것을 보고 한편 자랑스럽기도 하고, 나 스스로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더 부끄럽기 짝이 없었고…

고교시절 내 이 숨겨진 에피소드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일찍이 문학 소년의 꿈을 접고, 차갑고, 딱딱하고 변화무상한 정치현상을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지금도 틈만 나면 시(詩)고 소설이고, 전기고 닥치는 대로 즐겨 읽는 버릇은 아마 고교시절 그 많은 훌륭한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가운데서도 유공희 선생님의 영향이 가장 컸었다고 생각한다. 나를 이 세상에 낳아주신 부모님께도 불효를 했지만, 감수성이 많은 10대 소년시절에 나에게 배움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신 그 많은 선생님들, 특히 시정(詩情)을 내 가슴에 담뿍 안겨주신 유공희 선생님께 뒤늦게나마 감사하고 싶다. 그런데 고교를 떠난 뒤 유 선생님을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한 것이 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이번 자랑스런 광고(光高) 졸업 50주년을 맞이하여, 7회 기념사업으로 유공희 선생님 유고집을 출간하게 된 것은 시기적절하고 너무나도 값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고인이 되신 유 선생님의 가르침에 고개 숙여, 뒤늦게나마 다시 감사드리며, 이 유고가 햇빛을 볼 수 있도록 많은 수고를 하신 몇몇 동창 친구들에게도 감사한다.                                                              (전 주미대사, 고려대 석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