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생각하며
남 유 정(시인)
어린 시절 참나무를 훑는 바람 소리가 들리는 곳에 살았다. 서늘한 뒤란으로 돌아가면 산비탈을 내려오며 바람이 마른 참나무 잎 긁는 소리가 들렸다. 겨울밤, 누워서 잠을 청할 때면 사각사각 마른 잎을 밟고 오는 바람 소리가 늑골 사이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나무들은 흔들림으로 키를 세우며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뒤란에는 우물이 있었다. 두레박을 내리면 텀벙 물에 닿는 소리. 찰랑찰랑 넘치는 물을 길어 올리던 기억.
내게는 지금까지 그 바람 소리와 두레박을 내리던 우물이 따라 다닌다. 먼데서 찾아온 바람 소리가 가슴을 서늘하게 할 때면 어김없이 가슴 밑바닥으로 두레박을 내려 보낸다. 내려도 닿지 않는 바닥. 아무것도 길어 올리지 못 하는 헛손질을 계속 하는 것은 언젠가는 내 목소리에 닿으리라는 갈증 때문이 아닐까? 갈증은 매순간 내가 살아있다는 고통스런 자각과 함께 끝 모를 열정의 산화를 부른다. 또한 싫던 좋던 기억 속에 살아있는 풍경들은 시를 이룬다. 끊임없이 소진되고도 길을 떠나는 영혼처럼 만족을 모르는 시도 원천적인 허기에 보다 가깝다. 제 집을 떠메고 길 떠나는 달팽이처럼 느린 걸음으로 가야하는 것이 시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세월 속에
씨앗을
묻었다
바람은 서쪽으로 불고
사랑은 붉은수수밭처럼 울었다
씨앗을 기억하지 못 하는 풀잎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렸다
밤길을
홀로
걸었다
―졸시「자화상」
울음은 오래된 씨앗이다. 세월 속에서 씨앗은 발아하고 슬픔이 무성하다. 마그마가 들끓는 화산의 내부처럼 소용돌이가 아우성이다. 삶의 중심을 관통하고자 하는 뜨거움이 밤길을 홀로 걸어가게 하였을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도 세월 속에 심은 씨앗이 눈을 뜨는 것처럼 오래 걸려야 하는 일일 것이다.
사막의 먼 나라에서는 인간 폭탄이 터지고, 동남아에서는 바다의 눈이 발가락을 꿈쩍했을 뿐인데 해안이 혼비백산한다는 소식이 가슴을 더없이 신산하게 한다. 마음의 가파른 비탈을 어떻게 이겨 나갈까가 문제다.
하루가 더 큰 절망을 떠안으며 내일로 나아가듯이 시는 결국 부재를 통해 삶을 묘사하고, 증명하는 덧없는 행위는 아니던가?
신경 줄기마다 불이 붙어
집을 뛰쳐나간
내게는 불에 덴
상처가 있지요
기억의 주름마다 각인된
갑골문자, 불길을 피하지 않은
고대국가의 뿌리 깊은
유골이 숨겨져 있지요
오세요
아프지 않게
불타며 날아간 꽃잎들의
흔적, 스러진 한 나라의 잔해처럼
휘어진 길마다 멍들어
지금 푸르답니다
―졸시 「봄비에 푸른 잎이 젖네」
살아 있다는 것은 견디어온 삶의 궤적이다. 상처는 깊고, 기다림은 여전히 멀다. 나무들은 몸속에 한 꺼풀씩 제 죽음을 저장한다. 그 흔적들은 좀더 근원적인 것에 다가가게 만든다.
매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은 매순간 죽는 일이라니!
매순간 사랑하는 일은 매순간 사랑으로부터 멀어지는 일이라니!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존재 밖으로 던져지는 것이라니!
그러니 어쩌랴, 이 덧없음을 끝끝내 사랑해야 하는 것이 시인 것을. 잔해를 끌어안고도 푸르게 멍들어 젖어 있는 잎처럼 노래해야 하는 것이 시인 것을.
시는 답을 찾아 가지 않는다. 질문을 따라갈 뿐이다. 이 낡은 풍경 속에서 나는 어떻게 낯선 눈과 마주쳐야 할까? 벼락이 치는 최초의 깨달음과 만나야 할까? 그 생경한 뼈에 따뜻한 체온의 살갗을 입혀야 할까?
(우이시 제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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