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바리키노에서 열 번째 행성까지 / 이성렬

운수재 2007. 11. 30. 06:01

 

 

바리키노에서 열 번째 행성까지

이 성 렬(시인)

 

나는 서점을 자주 찾는다, 적어도 이틀에 한 번쯤. 학생회관 1층 한 부분을 차지하는 이 책방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폴 오스터 소설; 시사 연예잡지들; 아일랜드 여행 책자; 펭귄 그림책; 갈색의 고지도; 커다란 색안경을 쓴 여배우의 자서전; 체 게바라의 모자에 붙은 한 개의 붉은 별; 천장에 걸린 지구본들… 점원 몰래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서 홀짝거리며, 푹신한 소파에 앉아 졸기도 하고 사람 구경도 하는데, 가장 즐거운 일은 단연 백일몽이다. 보험회사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카프카가 아버지의 눈초리를 피하여 골방에서 소설을 써내려갔던 것처럼, 그러나 나는 그보다 더 운이 좋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으며, 또한 일과시간에도 몽상을 즐길 수 있으니.

 

이곳은 경이로운 것들로 가득하며, 나는 사물들에 무척 관심이 많다. 가령, 그레이 해부도 남자의 몸에서 갈비뼈 한 대가 빠져나가는 순간을 어떻게 잡아낼 수 있을까? 불빛은 정말로 내가 쳐다보는 동안에만 존재하는 것일까? 지난번에 나는 소파에 앉아 졸고 있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굴뚝새가 불쑥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굴뚝새!>라는 외침까지 들려왔다. 그것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내 생의 어느 부분이 굴뚝, 새, 또는 굴뚝새와 관련되었을까. 나는 내가 굴뚝새를 결코 본 적이 없으며, 그것에 대해 읽은 적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만, 그 당시에 언덕 위에서 발아래 굴뚝들을 오래 내려다 본 적이 있으며, 공중에 떠 있는 어떤 새의 날갯짓을 눈여겨보았을 뿐. 그 어떤 메카니즘에 의하여 굴뚝과 새는 내 안에서 친구로 맺어진 것일까?

 

나는 이곳에서 또한 시를 읽는다. 윌리엄 블레이크, 보르헤스, 빌리 콜린스의 시들을. 시는 무엇일까. 몇 권의 시론과 문학이론서를 읽어도 시가 무엇인지 도통 잡히지 않는다. 어떤 이는 시가 무엇인지 말하기보다는 시를 구성하는 것들을 열거하지만, 그것은 해부된 생물체와 같다. 또 어떤 이는 시의 역사를 얘기하지만, 그것은 역사학자가 인간이 무엇인지를 논하는 것과 같다. 유명한 몇몇 시인들의 작품을 분석하며 시의 본질을 어렴풋이 제시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경영학자가 흔히 이용하는 케이스 스터디가 될 것이다. T. S. 엘리어트(이 시인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름에서 너무 엘리트의 냄새가 난다)의 말처럼〈시에 대한 정의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혹시, 시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시와 다른 것들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시와 다른 것들과의 관계로 엮어지는 촘촘한 그물눈에 대해서. 시와 시 아닌 것(가령, 산문) 사이의 관계, 시와 사회과학 논문의 차이, 시와 신문 기사의 효용, 등등. 그러나 그렇게 하자면 한이 없을 것이다. 엘리어트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글자 그대로 <언어의 사원> 쯤으로 정리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다, 애매하지만 그 이상 멋진 표현도 없을 듯하니.

시는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다. 오랜 구애 끝에, 에곤 쉴레의 그림 속 여인처럼 치마 속의 은밀한 부분을 슬쩍 드러내어 주는 것. 그러나 구애는 열렬해야 하고, 시인의 삶은 충일해야 한다. 시는 어떻게 나를 처음 찾아 주었을까. 그것은 한 세기가 끝나가는 어느 겨울 호텔방에서였다.

 

아주 오래 전, 윤동주의 시들을 읽으며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적이 있었다. 그 때, 삶은 끔찍하게 아팠었지만, 나의 마음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없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어느 겨울날 출장지 호텔방에서 그 어두운 판화들을 비껴볼 수 있었다1).

 

나는 그것이 자연발화였다고 믿는다. 내 안에 오래 축적되었던 것들이 그날 어둠 속에서 내 심장에 불을 댕긴 것이다. 어두운 판화들이 명징한 걸음으로 걸어 나와 수첩을 채우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친척집 일본식 벽장에서 우연히 찾아낸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지바고』, 우랄 산맥 저편의 작은 도시 바리키노, 그리고 혁명기의 사람들. 그 기억은 오래 살아남아 다음과 같은 시로 태어났다.

 

모든 겨울은 갈대밭을 헤맨 끝에

시베리아의 작은 마을, 바리키노로 돌아왔다

거기 야윈 뺨을 가진 언덕은

묘지 주위에 서 있는 죽은 나무들에게

새로운 고난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검은 숲을 지나 무너진 외딴 집에서

밤짐승들은 유령처럼 서성거렸다

쇠그릇들은 인적 끊긴 부엌에서 기다렸고

소용돌이치는 시간 속에 내쳐진 노래는 섬뜩했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목숨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음은 형상을 잃어가며 가장 투명한 소리를 냈다

그 밤의 마지막 어둠은 꺼진 난로의 불씨 하나를

새로운 별자리로 옮겨 놓았다

―졸시「러시아 삽화 II」2)

 

바리키노의 쇠그릇, 밤짐승, 난로의 불씨에게 나는 오랫동안 말을 걸었었고, 그 이미지들은 내 안에 숨어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잠든 때에만 나타났던 유령들이 어느 날 불쑥 내 앞에 나타났다. 어쩌자고 그 늦은 나이에! 그러나 나는 그 판화들을 금방 알아보았다. 해변에서 오징어뼈 한 조각과 노닌 기억이 있다.

 

해변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비극적인 모습으로 모래에 반쯤 파묻혀서 침몰 직전 수면 위에 남은 배의 마지막 이물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가가서 까끌까끌한 면을 손톱으로 긁었을 때 표면에서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났다. 그것은 겹겹의 각질층으로 싸여 외부로부터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러나 뒤집어 보았을 때 그 속살은 너무나 부드러운 해면체와 같은 연약한 분말의 다발이었다. 한편으론 단단하고 한편으론 푹신한 손가락 끝의 느낌을 말로 옮기기엔 내 혀가 석고처럼 굳어 있었다. 잠시 혀를 내밀어 흩어지는 분말을 감촉했다. 귀에 대었을 때 거기서는 다공성 석회질에 흡착되어 있던 물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한여름밤 가위눌린 꿈과 같은 목숨의 최후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은 우연히 나의 생과 마주친 한 조각 가벼운 중력의 흔적이었을까.

―졸시「오징어뼈에 대한 몽상」3)

 

내게 있어서 시 쓰기는 사물에 말을 거는 것이다. 사물의 잔등에 돋은 소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보는 것, 사물의 심장에 돋은 동맥을 다초점렌즈로 들여다보는 것, 사물의 푸른 모자를 벗겨 내 머리에 얹어보는 것. 그러나 사물은 까탈스럽고 거의 말이 없다. 어쩌다가 다정했다 하더라도 그 순간 뿐, 다시 침묵한다. 그러니 시 쓰기는 항상 움직이는 표적이다, 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

 

사물들은 고집 센 종마(種馬)처럼 이름의 울타리에 갇히기를 매우 싫어한다. 사물의 이러한 자존심 때문에 세계를 총체적으로,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철학자들은 이미 너무 많은 질문을 던졌지만, 그 어느 것에도 명확한 해답을 제시할 수 없었다. 과학은 내 슬픔의 근원에 대해 어떤 설명도 줄 수 없다. 나는 이 세계가 무한히 신비로우며, 아직도 새로운 이름을 줄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는 것만 받아들인다. 그것은 생물학자가 새로운 종(種)을 발견하는 것과는 별개의 작업이다. 예를 들면 연꽃에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 그러나 물론 그 이름은 즉시 낡은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사물에 대한 탐구하는 작업은 헛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끝없이 이름바꾸기를 반복하는 것들의 그 몸짓 속에 영원한 것, 불멸하는 것이 담겨 있으므로. 마치 내 몸의 세포들이 주기적으로 몽땅 바뀌어도 영혼은 기적적으로 남아 있듯이. 그러나 그 불멸의 것을 찾아가기 위해 시인은 불멸하지 말아야 할 것!

 

아르드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허위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우슈비츠를 경험하지 못한 나는, 수용소로 진입하는 기찻길을 시로 표현할 길이 없다. 나는 그런 생을 살지 못했던 것이다. <삶과 문학 속에서 사랑이라는 왼손과 자유라는 오른손은 신명나는 박장(拍掌)을 이루지 못하고 더러 따로 놀았던 것 같다>는, 김수영에 대한 어떤 이의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 두 가지의 광대한 주제를 아우른 시인은 거의 부재하기 때문에. 자유가 얻어진 후의 생에 대하여 아무런 실마리도 가지고 있지 않은, 형편없는 토막글쟁이인 나는 당분간은 생의 외로움, 살아가는 슬픔에 몸을 맡길 터. 슬픔과 아름다움이 교직되는 시를 쓰고자 할 터. 어쩌면 세상의 불공정함에 질려버린, 또는 이름을 낸다는 것의 허망함을 잘 아는, 시인의 도피일지도 모르지만, 내 꿈은 당분간 별로 거창하지 않다. 좋은 이들과 술자리에서 낭독할 수 있는 시를 쓰면 기쁘겠다. 첫 시집을 펴낸 후 가진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기억한다. 이숭원, 방민호, 우정권 등의 지인들과 시를 낭독하며 춤추던 자리에서 방민호 교수는 마치 노루처럼 한쪽 귀를 쫑긋 세운 채 눈을 감고 이숭원 교수의 낭독을 듣고 있었다. 살아 있는 동안 기억될 아름다운 자리들이 더 많으면 좋겠다. 더 욕심을 부리자면, 어렵게 사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면 행복하겠다.

 

경품 자동차가 로비 한가운데에 놓여 있고 치과병원, 보석상, 극장, 일식집, 중국음식점, 햄버거 가게 등등… 상점으로 가득한 시장은 얼마나 흥미로운 곳인가, 나는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다시 시 쓰기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이곳에서 나는 내 시의 스승 중의 하나인 빠블로 네루다를 생각한다. 아마도 <시를 쓰는 것은 호흡하는 것과 같다>고 고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시인 네루다. 그는 스스로 anti-intellectual이라고 했고, 시론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위대한 시인의 이러한 고백은 뜻밖일 수도 있다. 아마도 시를 쓰고자 하는 어떤 절실한 동기와 체험에 의하여 생겨난 시는 시론의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으며, 저절로 자신의 시적 형식을 찾아간다는 것이 네루다의 생각인 듯하다. 나는 시장에서 생각한다, 오늘날 많은 시인들은 시인임을 내보이기 위하여, 시인임을 유지하기 위하여, 시인임에 의하여 무엇인가를 얻기 위하여 시를 쓰는 것이 아닌가. 시를 써야 할 내적 필요성이 존재할 때만 시를 쓸 것. 내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인 시만을 발표할 것. 생시에 인정받지 못할 각오를 할 것. 내가 사라진 후에 너덜너덜한 종이 위에 내 시들이 흩날릴지라도 실망하지 말 것. 시는 사는 만큼 쓰여지니 열심히 살 것, 그리고 철저히 외로워질 것. 내 시를 읽는 독자들의 시간 값으로 돈을 내고 시를 올릴 것!

 

스페이스 워킹․2

 

작품 게재료를 보냈다.

지폐들은 손바닥에 푸른

물감을 남기고 날아갔다.

가을길을 터벅터벅 걸어

태양의 열 번째 행성

2003 UB313네 집을 찾아갔다.

이름이 왜 이상하냐고 물었더니

너무 오래 혼자 살아서 그렇다 했다.

시를 올리는데 왜 돈을 내니,

거북한 이력에 시인임을 내세워

착한 문인들 불편하게 한 값.

사라지지 않고 얼굴 내밀려한 값.

쓰레기더미에 한 묶음 보탠 값.

바램과는 달리 가난한 이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한 값.

UB는 말했다.

이제 아무에게도

빛을 보내지 않을 테니

형제 맺고 여기서 함께 살자.

                                                                                                (우이시 제21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