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 송문헌

운수재 2007. 12. 10. 06:00

 

 

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송 문 헌(시인)

 

시를 쓰는 이들은 누구나 늘 詩作을 위해 오감을 열어놓고 있으리라. 나 또한 그리 하려 노력하지만 습관성으로 정착되진 못한 듯싶다. 시는 온몸으로 써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늘 안이한 자세로 시를 쓰려 덤벼드는 것은 아닌지, 만족한 시가 쓰여 지지 않아 자괴지심에 빠지는 날은 그래서 더욱 힘이 빠질 때가 있다. 수년 전 제법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내 사업체가 연쇄부도로 문을 닫자 늦은 나이에 시를 쓰겠다고 덤벼든 내게 ‘너는 시 나부랭이나 쓴답시고 한눈팔 때부터 이리 될 줄 알았다’고 가까운 지인이 원망하듯 내게 던지던 그 말이 아직도 부채처럼 남아 이따금 나를 괴롭힐 때가 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시를 쓰게 된 것을 후회하거나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러고 보면 나도 어지간히 미련한 사람인지 모른다. 날마다 수많은 시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앞으로도 애송되는 시 한 편 남기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여직 시를 쓰고 있는 나는 정말 아둔한 사람은 아닌지. 그래도 무엇인가 덩그마니 텅 빈 不在를 느낄 때 난 시와 조우하게 되는 듯하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생각나게 하는 동물적 욕구에서일까. 아래의 내 졸시「달밤」은 어느 초겨울 밤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 못 이루다 마당에 나오니 마치 소금처럼 차가운 달빛이 물웅덩이에 비치는데 그 물속 달을 들여다보자니 문득 정들었던 사람 얼굴이 얼핏얼핏 떠올랐다. 오랜 날 볼 수 없는 이 생각에 미치자 그와의 많은 날들 생각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 일어나 쓴 졸시 이다.

 

달밤

 

동짓달 소금 달빛이

마당 가득 시리다

 

이 밤 잠 못 이루는 이

그 누구

 

웅덩이 속 흐르는 구름 사이로

산 같은 그리움 떠 가고 있다

               -「시와시학」2002년 가을호

 

시를 억지로 쓸 수 없듯이 아무리 테마시라도 절실하지 않으면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난 주로 시가 쓰고 싶을 때만 달려드는 편인데 시작하면 짧아도 너댓 시간이거나 대게 밤새 아니면 종일 매달리는 편이다. 그리고 한동안 잊은 듯 밀쳐둔다. 그런 날은 영락없이 집에서 핀잔을 듣거나 약속을 잊을 때가 있어 낭패를 보기도 한다. 요즘은 하는 일이 단순하여 되도록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아무 약속도 하지 않는다. 아니 꼼짝 않는 편이다. 한 주간 내게 잡히는 시심은 그때 끝장을 내려 마음먹지만 거의 그리 되진 않는 편이다. 한강변에 사는 나는 어느 여름이 끝나가던 날 늦게 술에 취해 귀가하여 무덥고 후덥지근하기도 하여 옷을 갈아입고 술도 깰 겸 한강 고수부지로 나간 적이 있다. 한참 노란 달맞이꽃이 지천인 강가를 거닐다 무심히 물가에 웅크리고 앉아 천천히 일렁이며 흐르는 물굽이에 비치는 달을 들여다보며 아아 백중 때인 이맘때면 그 산사도 하안거를 끝낸 스님들이 산문을 나서겠구나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한때 내가 반년이 넘게 머물렀던 문경의 그 산사는 공양주와 나 그리고 주지스님, 이렇게 단출하게 살던 때도 있었다. 산 중턱 그 절간은 종일 이따금 들리는 풍경소리뿐 아무도 오가지 않는 적막강산이었다. 하루 세 번 법당에 들어 예불을 올리고 밭의 채소를 돌보는 일이 하루 일과의 전부였다. 훗날 내게 또 다른 그리움이 둥지 튼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난 고수부지에서 들어와 새벽녘까지 긴긴 시를 써놓았다. 그리고 다시 줄이고 또 고쳐 쓴 시가 아래의 졸시「달맞이꽃」 이다.

 

달맞이꽃

 

염화미소일까

 

먹장 같은 굽이굽이 스타카토 은빛

 

문자 메시지를 보내오지만

 

가섭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예술세계」2003년 가을호

 

그러고 보니 나는 주로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동안에 쓴 시가 많은 듯하다. 많은 이들도 그러겠지만. 그해 가을 사람들과 섞이는 시간이 줄어든 나는 자주 자연과 주위의 사물에 시선이 머물 때가 많아졌다. 몸살이 나 일주 여일째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나는 그날은 좀 덜한 듯하여 혼자 남은 빈집을 청소하는 중이었다. 신발장을 열어보다 신지 않는 쭈그러들고 곰팡이 난 신발들을 보니 꼭 자신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입는 바지 허릿단이 헐렁해져 아예 천으로 된 끈으로 동여매고 지내던 그 즈음, 그날따라 허허로운 마음에 마당을 어정거리다 마른 풀섶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을 보고 어찌나 반가우면서도 안쓰럽던지. 그날 늦도록 다시 아래의 졸시를 쓰게 되었다.

 

소리의 넋

-자화상․ 4

 

강을 건너가는 허물어진 낮달의 그림자

 

먼 데 어둠을 등진 채 달려가는 기차 소리

벗은 우듬지에 머무는 바람

신발장 곰팡이 낀 등산화

쭈그러져 누운 단화들

 

겹치는 바지 허릿단

마른 풀잎 속에서

그러나

다시 피는 들꽃

 

너는 누구, 소리의 넋이더냐

              -「시문학」2004년 6월호

 

눈이 한번 내리면 봄까지 녹지 않아 차를 잘못 들였다간 꼼짝없이 이듬해 4월이 다 가도록 운행을 하지 못하는 곳이 그 절간이다. 더구나 경사가 심해 차를 몰고 올라갈 땐 길은 안 보이고 하늘만 보여 목을 쭉 뽑아 올리고 운전을 해야 했다. 그해 동짓달 그날은 눈이 내리는데도 그곳에 머물던 노스님(서암 큰스님)을 뵈러 유독 많은 스님들이 찾아 왔다. 혼자 요사채 방에 들어앉아 이따금 방문을 열고 내리는 눈을 바라보기도 했지만 실상은 누군가 찾아오기를 기다렸는지도 모른다. 그날 눈은 해지도록 그치지 않았고 늦은 밤 툭! 소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와 이런저런 생각으로 나는 잠 못 이루다 새벽예불을 알리는 도량석 소리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법당으로 향해야했다.

 

흰 소를 찾아서

-바람의 칸타타․1

 

어둑발 속에 길 떠나는 흰소들의 발자국 소리 분주합니다

산문을 나서는 바랑을 따라 하얗게 길을 내며 갑니다

사람들이 밤하늘 별처럼 많기도 했던 동짓날 밤 당신은

 

나는 당신을 보내 드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당신을 단 하루도 잊어 본 적이 없습니다

삼동 내내 마른 가지에 우는 바람소리 잠 못 이룹니다

 

재를 넘어 산길마다 발길 닿는 당신은 오늘 밤

날짐승도 오가지 못할 먼먼 산사를 찾아

잿빛 굽이굽이 팔랑팔랑 찾아오시렵니까

 

소리 소문도 없이 살그락 살그락 걸어오실 당신

당신이 그랬듯이 이 밤은 나 촛불 하나 켜들고

오시는 길 산모랭이로 사운사운 귀의 돌문을 열어 놓겠습니다

 

가랑잎 휘파람을 앞세우고 오실 당신, 당신은

마당 가득 파르라니 은빛 승무 한 판 펼치시렵니까

산바람 홀로 깨어 읽는 독경 소리 한밤 내 가슴을 두드립니다

                ―계간「시와시학」2005 봄호

 

음력 이월 이른봄의 그 절간은 바람만 이따금 다녀갈 뿐 종일 누구하나 오가는 이 없이 적요하기만 하다. 산굴청에선 아직은 으실실한 한기가 내려오기도 했지만 한낮엔 제법 햇살이 승복을 따습게 덥혀주었다. 이른봄 나는 머물던 절간에서의 졸시를 다시 한 편 쓸 수 있었다.

 

햇살수레를 끌고 오는 봄

―바람의 칸타타․15

 

禪에 든

햇살을 밀치며 이따금

풍경소리

 

이월

山中, 절집 한낮은

고요의 중량만큼이나 차갑고

따스하다

            -「시문학」2005년 7월호

 

십여 년 전 나는 삼십여 년을 쌓아온 재물을 다 잃었다. 재물을 잃고 나니 많은 마음들이 떠났음도 한참 후에야 다시 알게 되었다. 망하고 나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먼저 배신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 것 또한 한참 후의 일이었다. 부질없는 감정을 삭이는데 그 이후 다시 몇 년이 걸렸다. 빈 들녘에 눈이 내리 듯 한동안 스산한 마음뿐이었지만 아마도 그때부터 하나 둘 시들이 내게 찾아왔지 않았나 싶다. 빈 마음에 시란 것들이 하나하나 찾아드니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혼자 고마워해 보기도 하면서. 아직도 난 시를 어떻게 써야할지 확연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난 포장되지 않은 내 삶의 언저리 이야기들을 과장되지 않고 진솔하게 시로 형상화 해 나가고 싶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늘그막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시 쓰기란 것에 감사한다. 발로 찾아다니며 외롭고 쓸쓸한 단면들을 훈훈하게 그려낼 수 있으면 참 좋겠단 생각이다. 천학비재하여 아직도 어설프기만 한 내 시와 나의 시에 대한 생각을 내놓는 것 또한 어눌하고 어설퍼 부끄럽기만 하다. 좀더 열심히 읽고 진지하게 쓰고 고치며 시에 매달려 봐야겠단 다짐을 다시 해 본다.

                                                                                                                (우이시 제22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