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병춘(시인)
강변을 걷는다.
발바닥이 후끈후끈해진다. 강물소리 새소리에 저절로 젖어든다. 가만히 앉아 떠가는 조각구름에 지친 어깨를 기대본다. 멀찌감치 누워 있는 돌 하나를 바라본다. 묘한 형상의 돌을 발견하게 되면 가만히 가서 쓰다듬어 보기도 한다. 그렇게 만난 돌이 거실 한 구석에 앉아 이른 아침 나와 눈을 마주친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곱슬머리 형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뜬 아프리카 소년 하나, 빈 강물에 한 척의 배, 쪽구름이 한가로이 떠서 나의 고독을 달래준다. 바라보는 시간과 심상에 따라 창문으로 스며드는 빛의 광도에 따라 느낌에 많은 편차를 보인다.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볼 때와 상큼한 허브차를 마시며 바라볼 때, 창문을 열고 바라볼 때와 커튼을 드리우고 한밤중에 마주칠 때의 느낌이 사뭇 다르다. 같은 돌인데 이렇게 달리 느껴지고 달리 해석이 된다. 어떤 때는 돌이 빙그레 웃기도 하고 어쩐 일인지 우울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한다. 똑 같은 돌인데 그 느낌이 천양지차로 달라지는 까닭이 무엇인가?
아무 생각 없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친 돌 하나 새 하나 들꽃 하나와 알 수 없는 오묘한 교감을 느낄 때 그곳 거기에 한정 없이 빨려든다. 몰입한다. 형용할 길 없는 희열을 느낀다. 엑스타시의 황홀을 만끽한다. 딱 한 번의 마주침...... 너와 나의 만남이다. 지극한 알 수 없는 시공의 교합이다. 시간도 공간도 영원도 딱 발걸음을 멈춘다. 살다보면 그런 순간이 있다. 영감이 발달한 시인은 그런 순간을 수시로 만나겠지만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가끔가다 그런 행운의 순간을 만나는 때가 있다. 나의 취미는 별다른 취미가 없다. 산오르기 산책하기 멍하게 바라보기 몽상하기 바둑 두기 등 주로 돌 보기 돌 줍기 돌 나르기라 할 수 있다.
바둑에는
무궁무진한 우주가 있다. 가로 세로 19줄, 361집으로 구성된 바둑판은 우주의 축도라 할 수 있다. 가운데 천원(天元, 태양)을 중심으로 수성-금성-지구-화성-목성-토성-천왕성-해 왕성으로 8개의 항성이 돌고 돈다. 명왕성과 달은 생략이 되었지만 그곳에서 펼쳐지는 흑과 백의 상생과 상극의 대결은 마치 동양철학의 음양원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만고 이래 똑 같은 바둑이 두어진 경우는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기사는 이창호와 이세돌 서봉수 등이다. 이창호의 바둑은 정통파의 묵직한 돌부처의 형상으로 늘 믿음직스럽다. 이세돌의 바둑은 좌충우돌 변화무쌍이다. 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한다. 예측불허라서 관객의 입장으로선 이세돌의 바둑이 으뜸이다. 서봉수의 바둑은 그야말로 배짱이 두둑하다. 잡초류 혹은 된장바둑으로 통한다. 흑과 백이 그리는 그림은 이 세상에서 나온 어떤 동양화 못지않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니고 있다. 인간 세상의 오욕칠정이 그대로 반상에 드러난다. 그 속에는 물론 피 철철 흘리는 전쟁의 파노라마가 있고 고요한 평화가 있고 양보가 있고 인내가 있으며 그리움과 기다림이 있다. 가끔 가다 뼈저린 패배가 ! 있고 때로는 아슬아슬한 승리가 펼쳐진다. 반집차로 역전을 시키는 승부사의 한숨소리와 쾌재가 있다.
반상 위에 맨 처음 놓여지는 까만 돌 하나가 천지창조의 첫날처럼 새로운 세상을 연다. 처음에는 정석대로 두어지다가 포석이 끝나면 힘겨루기 전쟁이 벌어진다. 축 몰이로 떨어져나가는 아픔도 있다. 사석작전으로 과감히 버려지는 돌도 있다. 무심하게 던져지는 돌 하나에 운명이 달려있다. 돌 하나하나 쌓여 하루가 되고 1년 365일이 되고 일생이 된다. 바둑이 끝나면 아스라한 고요가 찾아온다. 지평선이나 수평선처럼 까마득한 정적만이 감돈다. 두 통의 바둑통 속에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운명의 언어들이 미완의 꿈들이 숨쉬고 있다. 마치 땅속에 숨어있는 씨앗처럼 새로운 생명 아름다운 시들이 태어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네 코가 아니었더라면/ 세상은 좀 달랐을 터인데/ 네 코가 코끼리처럼 너무 길어서/ 상아가 너무 날카로워서/ 세상이 이렇게 상처받고 발가벗겨지고 말았구나/ 코기토야/ 네 생각이 너무 깊어서/ 네 오만이 바벨탑처럼 너무 높아서/ 오르고 오르다 떨어진 자가/ 그 얼마나 되던가/ 깊고 깊은 낭에 떨어져/ 얼마나 비명을 질러댔던가/ 코기토야 저 처절한 메아리가 들리지 않는가/ 오늘도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부터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존재한다 나는, 그래서/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렇게 시를 쓴다/ 숨을 쉰다 꿈을 꾸고 둘도 없는 너랑 사랑을 한다/ 네 코가 아니었더라면/ 세상은 좀더 달라졌을 텐데/ 코기토야 이젠 좀 잠잠하거라/ 좀 게을러져라 나무늘보처럼
손은 텅 비었다.
전생이란 무엇인가? 먹고 먹히는 아수라장의 세상은 무엇이던가? 이 세상을 뜨고 나면 결국 나는 뒷동산에 묻혀서 한 떨기 풀꽃이 될 것이다. 나무로 태어나 구름을 이고 태양과 달과 별을 벗 삼는 시원한 바람 한 자락 될 것이다.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불이 되고 바람이 되어 윤회를 거듭할 것이다. 살은 썩어서 한 줌 흙이 되고 피는 썩어서 한 줌 시냇물이 되고 체온은 식어서 불꽃이 되고 호흡은 돌아가 산바람 강바람이 될 것이다.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모이면 몸이 되고 마음이 되고 살림이 된다. 지수화풍이 기운이 다하면 산산이 흩어진 이름이 된다. 108 번뇌의 원소로 날아가 허공으로 흩어질 것이다. 이 허공에 흩어질 메아리 이 허공에 흩어질 살풀이 춤, 이것들이 저 오색딱다구리의 목탁소리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장수하늘소의 외로운 날갯짓일는지 모른다. 이 세상사는 동안 나의 전생에 대하여 벗들에 대하여 나무들에 대하여 벌레들 새들 자식들 조상들에 대하여 증언하고 싶을 뿐이다.
나무속으로 들어가 보면 세상이 보이고 내가 보이고 전생이 들여다보일 때가 있다. 나무 나이테 속에 나무 이파리 속에 나무뿌리 속에 알알이 새겨져 있는 기록을 바라다보면 이 세상의 비밀문서가 숨어있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고 깜짝 놀랄 때가 많다. 나무는 나의 몸이며 마음이며 영혼임을 깨닫는다. 나뭇잎 한 장의 비밀을 아는 일, 그것이 나의 시쓰기 이다. 그 생명의 비밀을 아는 일, 그것이 나의 숙제이다. 나의 숨결은 바로 나뭇잎에서 왔다. 신선한 산소가 신묘한 향기가 아름다운 열매들이 배고픔을 달래주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나무들인가?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감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앵두나무 자두나무 모과나무 등 이런 나무부처님들에게 감사한다. 이 아름다운 열매들이 맺기까지 수고한 나비들 벌레들 햇살 달빛 별빛 구름 안개 천둥번개 개 짖는 소리 닭울음소리 나무아미타불 목탁소리 범종소리......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존재는 소리이며 향기이며 색깔이며 맛이며 촉감들이지 않던가? 색성향미촉(色聲香味觸)의 세계, 이 보이는 세상이 또한 공이 아닌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 아니던가?
내 손은 텅 비었다. 텅 빈 그릇이다. 알쏭달쏭한 약도가 그려져 있다. 오늘까지 이 약도를 보고 모르는 길을 물어물어 왔다. 손금 속에 운명이 적혀있다던가? 나의 내일모레도 이 텅 빈 손에 달려있다. 한 줌 움켜쥔 모래알들 손아귀에서 다 빠져나가는 날, 모래시계는 멈추겠지. 또 다른 운명의 손이 모래시계를 뒤집어놓으면 다시 모래알 하나하나 떨구며 숨을 쉬겠지. 그렇다. 나의 삶도 시도 취미들도 못된 버릇들도 이 양손에 달려있다. 나뭇잎 같은 손, 나뭇가지 같은 손, 나무뿌리 같은 손, 이것들이 움켜쥔 향기로운 열매를 먹으며 오늘을 살아간다.
빈손에 움켜쥔 모래알도 그 언젠가는 수많은 세월이 흐르다보면 어느 지층 아래 단단한 돌이 될 것이다. 돌을 바라볼 때마다 그 수많은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버지를 대하는 것 같아 반갑다. 나의 전생에 놓쳐버린 모래알의 어머니인 거 같아 아니 그 아들의 아들인거 같아
나는 오늘도 바둑알 하나를 쥐고
바둑판에 한 점을 올려놓는 것이다.
백지 위에 모래알 하나 잎사귀 하나를
조심스레 던져보는 것이다.
편지는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까?
어디 있는가? 엽서는 만년필은 가방은 허름한 신발은 그대는 결국 목적지가 어디인가? 니코스카잔차키스는 세상을 뜨면서 형제들이여 나에게 적선하시오 각자 15분의 시간을 누구에게 적선하고 있는가? 15분의 하루를 공간을 그 피나는 그리움을 한 편의 시를 한 장의 엽서를 엽서는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것인가? 나무가 이파리 날린다. 나무의 편지 가방 신발 이곳저곳 춤추면서 허공에 실린다. 가랑잎 하나 그렁그렁한 눈빛으로 뒤쫓는다. 행방을 그림자를 건들바람에 비틀.
(우이시 제22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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