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일화 / 임보

운수재 2008. 6. 18. 06:56

 

 

일화/   임보

 

 

일화(逸話)는 숨은 얘기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감춰진 얘기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일화가 실화보다 더 드러나서 세상의 사랑을 받기도 한다.

 

만해(萬海)와 단재(丹齋)는 강직한 분들로 유명하다.

그들의 성품을 말하는 다음의 일화들이 전한다.

 

만해는 만년에 친지의 도움으로 성북동 산록에

심우장(尋牛莊)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집을 남향이 아닌 북향으로 일부러 세웠는데

이는 조선총독부 쪽을 보기 싫어서 그랬노라고 전한다.

 

단재는 아침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나면

세숫물로 늘 옷소매가 젖어 있었다.

세면할 때조차도 머리 굽히는 일이 없어서

흐르는 물이 그렇게 옷소매를 적셨다는 얘기다.

 

어느 봄날 심우장엘 찾아가 보았다.

주인을 잃은 빈 집이 여전히 북향으로 앉아 있었다.

보아하니 북향바지어서 남향집을 앉히기가 어려운 터다.

만일 심우장이 남향으로 옹색하게 앉았더라면

총독부를 향해 종일 삿대질을 하려 그랬노라고 전했으리라.

 

나는 지사(志士)도 의사(義士)도 아니다.

세면할 때 머리 세우는 일도 없다.

그런데도 내 옷소매 역시 늘 젖어 있다.

어떻게

옷소매를 적시지 않고 물을 만질 수 있단 말인가?

 

                                      (펜문학 2008.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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