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읽기

솔개 / 김종길

운수재 2008. 9. 5. 10:52

 

 

솔개/   임보

 

 

시인도 지사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만해나 육사 같은 지조를 지닌 시인이라면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시인들은 강한 의지보다는 예민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므로 그들에게서 지사적 풍모를 기대한다는 것은 과도한 욕심일지 모른다.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김종길 「솔개」전문

 

이 글은 창공에 높이 떠 지상을 굽어보며 유유히 날고 있는 솔개를 통해 지사적 풍모를 지닌 선비 혹은 시인을 기리며 그리워하는 작품으로 읽힌다.

 

병 없이 앓는,/ 안동댐 민속촌의 헛제삿밥 같은./

그런 것들을 시랍시고 쓰지는 말자.

 

시가 원래 서정적인 글이기는 하지만 정서 과잉의 감상적인 작품을 만나게 되면 거부감이 일게 된다.

지나친 수사는 짙은 화장처럼 진실을 은폐하게 되므로 감동성이 약하다. 아니, 역겹게 느껴지기도 한다.

‘병 없이 앓는 시’란 그런 허세적, 가식적인 글을 두고 이르는 말이리라.

요즈음의 시들이 진실에 바탕을 두지 않고 손끝의 재주에만 매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그런 호들갑을 떠는 시들을 화자는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안동에 가면 ‘간고등어’와 함께 유명한 음식이 ‘헛제삿밥’이다.

 옛날에는 자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제사를 모셨다.

늦은 시간 제사를 마치고 둘러앉아 먹는 제사음식은 밤참으로 별미였다.

그래서 평소에도 그 제사음식을 만들어 먹는 풍습이 생겼는데 그것이 곧 헛제삿밥이다.

시도 헛제사 음식처럼 가식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인 것이다.

 

강 건너 임청각(臨淸閣) 기왓골에는/ 아직도 북만주의 삭풍이 불고,/

한낮에도 무시로 서리가 내린다.

 

임청각(臨淸閣)은 안동에 있는 고성 이씨 종택으로 500여 년의 긴 역사를 지닌 대저택이다.

일제 치하에서 이상룡(李相龍, 1858~1932)등 9명의 독립지사를 배출해 낸 선비가문의 고택이다.

화자는 임청각을 바라다보면서 북만주의 삭풍을 헤치며 독립운동을 펼쳤던 선열들의 매서운 정신을 상기한다.

그들의 불굴의 정신을 ‘한낮의 무서리’로 형상화 하고 있다.

왜 오늘날에는 그런 의기를 지닌 지사들이 없는가?

화자는 은근히 한탄하면서 오늘의 시인들도 그런 매서운 의기를 지녔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아쉬운 마음을 담고 있다.

 

진실은 따뜻한 아랫목이 아니라/ 성에 낀 창가에나 얼비치는 것,/

선열한 육사(陸史)의 겨울 무지개!

 

따스한 방안에 앉아 있으면 삭풍이 휘몰아치는 혹독한 바깥의 정황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성에 낀 창문에 기대 밖을 내다보기라도 해야 짐작할 수 있으리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안주하는 시인들에 대한 경계다.

육사는 그가 살았던 역사적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직시하지 않았던가.

 

매운 계절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 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절정」전문

 

육사는 그가 지금 자리하고 있는 곳을 찬바람 몰아치는 고원의 벼랑 끝으로 파악했다.

한 발짝 내디딜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그는 이 위기를 ‘강철로 된 무지개’로 보면서 극복하고자 했다.

지금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철처럼 혹독한 현실이지만 머지않아 무지개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믿음이다.

선열다운 육사의 곧은 정신을 만나게 된다.

화자는 안동 출신의 선열 시인 육사를 상기시키면서 의기의 소중함을 한결 강조하고 있는 장면이다.

‘선열(先烈)’이라는 명사를 형용사로 쓰고 있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유유히 날던 학 같은 건 이제는 없다./ 얼음 박힌 산천에 불을 지피며/

오늘도 타는 저녁노을 속,//

깃털 곤두세우고/ 찬 바람 거스르는/ 솔개 한 마리

 

창공을 유유히 나는 학처럼 고귀한 정신세계를 지녔던 옛날의 선비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아직도 겨울의 추위가 다 가시지 않은(‘얼음 박힌 산천’) 거친 세상인데, 그 추위를 녹이고자 불을 지피는 지사는 없단 말인가?

화자는 불타는 저녁놀 속 깃털 곤두세우며 창공을 날고 있는 한 마리 솔개를 제시하고 있다.

어쩌면 그 솔개가 시대를 거슬러 의연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시인 자신임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는 것도 같다.

더 나아가서는 시인의 고향 안동이 지닌 선비적 기상을 상징적으로 표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