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읽기

이성선의 <도피안사(到彼岸寺)>

운수재 2009. 7. 26. 15:56

 

 

 

 

도피안사(到彼岸寺)/                      임보

 

 

 

시인이 세상을 바라다보는 시선― 곧 시각을 나는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눈다.

지상적 시각과 수평적 시각 그리고 천상적 시각이다.

지상적 시각을 가진 시인은 현실을 중요시 여겨 비판적이고 참여적인 작품을 즐겨 쓰게 된다.

수평적 시각은 대상을 객관적 입장에서 바라다보는 태도다. 정물화를 그리듯 사물을 냉정하게 그려낸다.

천상적 시각은 현실 너머 저쪽에 관심을 갖는 시선이다. 그래서 본질의 세계, 이상향이나 내세 등을 추구한다.

이성선(李聖善, 1941~2001) 시인의 시선은 주로 천상적 시각을 선호한다.

 

허리 굽고 귀도 절벽인 노승이

누덕옷 속에

길을 모두 감추고 떠나버려서

 

그곳으로 가는 길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았다

 

뜻밖에 일찍 뜬 달이

둑 위 가랑잎과 누워 섹스하는 모습만

훔쳐보고 돌아왔다

                   ― 이성선 「到彼岸寺」전문

 

화자가 절을 찾아간다. '도피안사(到彼岸寺)'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가진 절이다.

 (실제로 철원의 개화산에 동명의 절이 있지만 굳이 작품 속의 현실과 결부시키지 않아도 상관없다.)

'피안에 이르는 절'이라는 뜻이 아닌가.

피안이란 강 건너 저 편, 불교에선 사바(娑婆,속세)인 이승을 넘어선 저쪽의 정토(淨土,이상향)를 의미한다.

곧 번뇌를 해탈한 열반경이다.

승려들이 토굴 속에 들어가 면벽좌선(面壁坐禪)을 하기도 하고,

긴 세월을 장좌불와(長坐不臥)나 혹은 묵언정진(默言精進)의 수행을 감행하는 것은 바로 그 피안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함이리라.

절의 이름이 '도피안사'니 그 절에 가면 마치 피안에 이르는 길이 보일 것도 같은 예감이 든다.

그래서 화자는 도피안사에 찾아간 것이다.

그러나 그 절에 가 봐도 이름과는 달리 피안으로 가는 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제2연).

화자는 그 이유를 제1연에서 재미있게 서술하고 있다. 노승이 이승을 떠나면서 그의 누더기 옷 속에 그 길을 감추고 가 버렸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고….

허리가 굽고 귀가 절벽인 노승이니 한평생의 고행으로 육신이 다 허물어진 고승이 연상된다.

그의 '누덕옷'은 무욕청정한 삶의 징표이기도 하지만, 또한 해탈한 육신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누덕옷 속에 '피안에 이르는 길'을 감추고 가 버렸다는 것이다.

 

피안이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일지도 모른다.

설령 어느 고승이 한평생의 정진으로 그 세상을 얻었다[得道] 치더라도 그것은 개인에게 한정된 신묘한 체험이므로 이웃에게 전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리라.

더욱이 그 길이 사바의 번뇌를 떨쳐버리는 것이라면 마음에 달린 문제이니 어찌 남과 더불어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이성선 시인은 피안 곧 정토에 이르는 길은 찾을 수 없다고 극적인 구조의 이야기를 통해서 그렇게 부정하고 있다.

 

제3연은 화자가 피안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겪은 정황의 제시다.

밤길이 어두우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을 했는데, 때마침 보름 무렵이었든지 예상하지 않았던 둥근 달이 떠올라 가는 길을 환히 비춰주고 있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둑길을 걷던 화자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상에 쏟아지는 교교한 달빛을 주시한다.

화자의 시선이 가 닿는 자리에 마른 낙엽이 한 잎 떨어져 있다.

그 낙엽 위에 달빛이 내려 앉아 그 고운 빛깔과 맑은 모양을 황홀히 드러낸다.

화자는 문득 지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에 눈이 열리며 희열에 잠긴다.

그 희열을 '성의 기쁨(섹스)'으로 은유하고 있다.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꽃인가? 여인인가?

물론 꽃이나 여인도 아름답지만 잘 익은 과일이나 동물의 새끼들도 너무 곱다.

아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풀잎이며, 곤충, 떠도는 구름, 흘러가는 물, 길가의 돌멩이도 다 아름답다.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다보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세상이 못마땅하고 괴로운 것은 욕심 때문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바라다보면 이 세상이 고해(苦海)가 된다.

만일 욕심 없이 바라다본다면 이 세상에 근심의 대상이 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어떤 마음으로 바라다보느냐에 따라 이 세상은 지옥이 되기도 하고 천국이 되기도 한다.

이 지상을 지옥으로 만드느냐 천국으로 만드느냐는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그러니 피안에 이르는 길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제3연을 다시 읽어 보면,

피안이 어느 먼 곳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상이 곧 피안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가랑잎과 달빛'이 빚어내는 황홀은 현세를 정토로 파악한 화자의 기쁨이다.

 

피안에 이르는 길이 어디냐고?

그대가 지금 서 있는 곳, 바로 이곳이 피안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승을 그처럼 황홀히 여기던 이성선 시인은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난 것이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