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읽기

시수헌 가는 길 / 임보

운수재 2007. 8. 15. 05:55

시수헌 가는 길

 

임 보

 

내가 사는 운수재는

우이동 골짜기에 있고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은

산마루 넘어 쌍문동에 있다

 

세심천 고갯길로 질러가면 30분

솔밭 지나 언덕길로 돌아가면 40분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로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꽃밭이 있기 때문

한 교회가 가꾼 작은 꽃밭인데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나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

어느 날 꽃밭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 들리나 한참 지켜보는데

 

나팔소리는 소식도 없고

나비 날개를 단 천사의 얼굴이

열 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있었다

 

반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다니

시수헌 가는 길이 더딘 것은

꽃밭에서 잠시 길을 잃기 때문

 

(월간『詩文學』2007.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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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문제작>

 

        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 이상옥

 

 

  시가 매혹적인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역시 뭐니뭐니 해도 시가 갖는 특유의 환기성 때문이다. 좋은 시는 환기성이 우세하다. 일상적 삶 속에서 놓치고 사는 삶의 진실을, 시는 환기하는 것이다. 좋은 시를 읽을 때 무릎을 탁 칠 만큼 아 그렇지, 내가 그것을 잊고 살았지라고 감동하게 되는 것은 바로 시 특유의 환기성에 기인하는 것이다.

 

  본지 지난 호에 발표된 이 시를 읽으면 난데없이 지난 5월 별세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생각나고, 이어서 그의 수필「인연」이 생각난다. 그리고는 아사코가 생각난다. 그래서 다시「인연」을 읽어본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 이 마지막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 세 번째 만났을 때의 아사코는 백합같이 시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스위트피나 목련꽃 같은 아사코의 이미지가 바랬기 때문에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도 피천득에게 아사코의 추억은 소양강 가을 경치처럼 늘 아름답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왜,「시수헌 가는 길」을 읽다가 피천득이 생각나고「인연」이, 그리고 아사코가 생각나고, 또한 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가. 이것은 바로 시의 환기성 때문이다. 시의 화자는 시인들의 사랑방 시수헌 가는 길을 일부러 짧은 고갯길보다는 긴 언덕길을 돌아서 다닌다. 언덕길 밑에는 채송화 맨드라미 봉선화 백일홍 예쁜 꽃들이 환하게 웃는 꽃밭이 있기 때문이다. 그 꽃들 가운데서도 화자를 붙든 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국종 꽃인데, 어느 날 꽃�을 지나다 발을 멈추고 나팔소리가 들리나 한참 지켜본다. 그때 나팔소리 대신 나비 날개를 단 천사의 얼굴, 열살쯤 되어 뵈는 과수원집 딸이 꽃 속에서 가만히 내다보고 잇었다. 꽃 속에 과수원집딸이라니, 이것은 현실 너머 신화의 공간을 환기한다. 현실의 꽃밭이 신화의 꽃밭으로 일변한 가운데 반 백년이 지나도 늙지 않은 채로 천사가 되어 꽃 속에 살고 있는 과수원집 딸을 만나 것이다.

  과수원집 딸이나 아사코는 원형상징이다. 피천득에게는 아사코로, 임보에게는 과수원집 딸로 각각 다르게 드러나지만, 이들은 꽃 같은 첫사랑의 원형이다.

 

(월간『詩文學』2007.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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