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겨울, 하늘소의 춤

망향대 오르는 길

운수재 2008. 11. 22. 06:23

 

 

망향대(望鄕臺)오르는 길/          임보

 

 

아들아

네게 산 오르는 길을 하나 일러주마

우이동(牛耳洞)에 오면

도선사(道詵寺) 골짜기로 들어서기 전에

천도회관(天道會館) 뒤 등성이로

접어 오르는 길이 있다

삼각산 남쪽 대동문 근처에서 시작하여

우이동 입구까지 벋어내린 능선인데

도선 절 앞을 병풍처럼 가리고

소귀천(牛耳川) 계곡을 만들고 있느니라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진달래 동산이라 부르고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귀천 앞산이라 일컫는다

열둬 개의 작은 봉우리들을 하나씩 밟고 오르는 능선길인데

앞봉우리에 오르기 전까지는 뒷봉우리를 볼 수가 없는

봉오리 뒤에 봉우리들이 감춰져 있는

그러니 높은 봉우리들이 낮은 봉우리 뒤에 숨어 있는

묘한 형상이구나

아들아 또 재미있는 것은

능선을 오르면서 우편을 보면

천인단애 소귀천 깊은 계곡 하며

하늘 위로는 백운(白雲), 인수(仁壽)가 솟구쳐 있고

도선에 오르는 길도 숲속에 싸여 아득히 건너다 보인다

고개를 돌려 좌편을 보면

수천의 잔잔한 구릉들이

낮은 잡목들을 가득 지고

수유(水踰)벌을 향해 벋어내리는데

장안의 천만 인가들이 벅적대며

산의 발등에까지 밀려와 있구나

좌는 속(俗)이요

우는 자연(自然)

말하자면

이 길은 속과 산의 경계에 있는

속도 아니고 산도 아닌

아니 속이면서 산인

묘한 길이구나

아들아

다리가 팍팍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오던 길을 되돌아보아도 좋다

헌데 길은 소나무 잡목 틈에 묻혀 보이지 않고

멀리 도봉(道峰)이 너의 눈길을 휘어잡을 것이다

땅의 등뼈로 일어서 있는 암벽의 그 산에

눈이 너무 시려 괴로우면

머리를 돌려 수락(水落)을 보아도 좋다

수락의 어깨에까지 솟구쳐 오른 상계동의 아파트 떼

사람의 손으로 빚어 올린 눈부신 모래성들

네 뜻이 아직 세상에 있으면

네 눈 속에 이들을 가둬도 좋다

아들아

다리가 좀 풀렸으면 다시 산을 오르자

멀리만 보지 말고 가까이도 보며 가자

진달래 상수리 개머루 잎새들도 예쁘구나

발굽에 걸린 썩은 자작나무

이름없는 잡풀들에도 잠시 눈을 주다 보면

까치 제비 멧새 비둘기

다람쥐 왕벌 개미들도

다정한 우리들의 이웃이구나

이들 잔 목숨의 수유(須臾)가 안쓰러워

고개를 들어 인수의 만세 봉우리를 부러워도 하겠구나

허나 우리 눈에는 그리 길게 보인

저 억만 세의 인수도

큰 눈으로 보면 그 또한 수유

가자

아홉 봉우리쯤 오르다 보면

우리 몇 몸뚱이 누일 만한 널따란 반석이 있느니라

그 반석에 등을 대고 누워 보면

무엇이 보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이라 하여

비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내 마음에는 그렇지가 않구나

나는 이 반석을 일러 망향대(望鄕臺)라 하는데

망향대에 자주 와서 누워 보면

하늘이 점점 자란 것을 본다

아들아

그동안 네 눈 속에 가두었던

이 지상의 일들이 작고 작아져

부질없는 티끌로 허공에 뜰 때

어느날 문득 고향이 드러나

도둑처럼 네 마음을 앗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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