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의 한 젊은 시인에게/ 임보
요즈음 어떻게 지내십니까?
가족들의 사랑과 이웃들의 존경을 받으며 즐겁게 살아가나요?
별로 그렇지 못하다고요?
아마 가족과 이웃들이 당신의 시에 대해 별로 관심을 안 가진 모양이군요.
그러나 너무 속상해 할 것 없습니다.
반 세기 가까이 시를 써 온 나도 아직 내 가족 가운데서 내 작품을 즐겨 읽는 독자를 얻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말입니다. 잠깐 농담을 해 볼까요.
당신이 쓴 한 편의 시가 한 일천만 원쯤 호가되는 그런 세상이 온다면,
(하기야 그런 세상이 오지 말라는 법도 없지요. 어떤 운동선수가 때린 공 하나는 수만 달러에 상당한 값을 지닌다고 하지 않던가요.)
당신의 인생은 그야말로 180도 달라질 것입니다.
당신의 가족들은 제왕처럼 당신을 모실 것이고, 당신의 이웃들은 영웅처럼 당신을 우러러볼 것이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시가 고가(高價)의 상품으로 평가되는 그런 세상에서 한번 살아보고 싶지요?
나도 가끔 그런 허황된 꿈에 젖은 때가 없지 않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는 별로 그런 세상이 오는 것을 환영하고 싶지는 않군요.
왜냐구요? 생각해 보세요.
시가 그렇게 비싼 값으로 팔리는 세상이 온다면 너도나도 시인이 되겠다고 매달릴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나 같은 보통사람은 머리 좋은 사람들에게 밀리고 밀려 어디 시인의 자리를 쉽게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내가 이렇게라도 시인의 대열에 낄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시를 별로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참, 어떻게 해서 시인이 되었습니까?
시인이 그럴듯해 보이던가요?
시 쓰는 일이 즐거워서 시를 떠나 살 수 없던가요?
나는 중학교 시절 시를 좋아하는 한 스승을 잘못(?) 만나 그만 물정도 모르고 시의 병이 들고 말았는데, 당신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혹 시의 길을 선택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는 않습니까?
때로 그런 생각을 가질 때가 없지 않다고요?
당연하지요. 어떤 시인이 노래했듯이 우리에게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길들에 대한 궁금증을 우리는 쉽게 떨쳐버릴 수 없으니까요.
지금 당신의 앞에 시보다도 더 근사해 보인 길이 혹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아직 젊다고 느낀다면 시를 버리고 그 길을 선택해 보세요.
평생 시를 붙들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좀 늦더라도 스스로 만족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그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 테니까요.
당신은 시를 능가하는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
젊은 시절의 나도 한때 시를 내팽개친 적이 있답니다.
돈이 많이 벌린다는 무역회사의 주위를 어정거려 보기도 했고, 생산 공장의 기계 소리를 들으며 날을 지새우기도 했습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시의 길로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돌아오게 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내가 그나마 덜 서투르게 할 수 있는 일은 이 지상에서 시 쓰는 것밖에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터득하게 된 것입니다.
내게 선망의 대상으로 보였던 어떠한 것도 시처럼 마음의 화평을 제공해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화평은커녕 불안과 초조의 가시방석으로 나를 괴롭혔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시에 대한 한때의 배반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한 시련을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시에 대한 애정을 더욱 키울 수 있었으니까요.
뉘우친 탕자(蕩子)가 새로운 애정을 가지고 그의 조강지처(糟糠之妻)의 품으로 되돌아오듯 말입니다.
모임에도 자주 나가나요? 동창회나 향우회 같은 이런저런 모임들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임들에 나가서 즐겁게 지낼 수 있다면 당신은 참 무던한 분입니다.
나는 그런 주변머리도 없습니다. 나는 그들의 화제에 쉽게 끼어들지 못합니다.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골프나 주식, 그리고 정치가나 운동선수 탤런트들에 관해서 나는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그들이 신나게 떠들며 즐거워할 때 나는 한 귀퉁이에서 혼자 소주나 홀짝거리다 일찍 일어나곤 합니다.
그러니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모임에 거의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도 문인들의 모임 같은 건 괜찮지 않느냐고요?
글쎄요. 그런 모임에 자주 나가 보았던가요?
회장이나 임원들을 선출하기 위해 일 년에 한두 번씩 모인 그런 모임 말입니까?
세미나 같은 행사도 한다고요? 네, 참 그렇군요. 국제적인 행사도 더러 하더군요.
문인들과의 교유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괜찮겠지요.
문예지의 편집자도 알게 되고, 유명한 출판사의 주간과도 사귈 수 있고, 더욱이 역량 있는 문인들과 친분을 쌓다보면 당신에게 그 흔한 문학상이라도 하나 굴러들어올 지 누가 압니까.
그러나 당신이 좋은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되는 모임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아니 대개의 모임들은 당신의 아까운 시간을 탕진케 할 뿐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혼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요?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나만의 깊은 생각에 이를 수 있습니다.
좋은 글은 역시 깊은 생각의 뿌리에서 돋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별 쓸모없는 모임들에 드나들며 당신의 소중한 인생을 소진키보다는 혼자 지내는 외로운 시간들을 많이 향유하면서 당신의 유일한 생애를 두텁게 가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그런 충동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만 작품을 서둘러 발표할 생각을 억제하기 바랍니다.
보잘것없는 작품은 아무리 일찍 발표해도 금방 묻히고 말지만, 좋은 작품은 아무리 늦게 드러내도 세상에 오래 남습니다.
발표가 늦는 것을 조급해하지 말고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충분한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요즈음 어떤 시들을 쓰고 있는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생활 주변에서 만난 이런저런 것들 닥치는 대로 그냥 쓴다고요?
쓰지 않고 빈둥거리며 기다리는 것보다야 가리지 않고 많이 쓰는 것도 나쁠 건 없겠지요.
그러나 이것은 시간이 충분한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사람들은 가려 쓸 수밖에 없습니다.
몇 사람이 잠시 읽고 마는 평범한 백 편의 작품을 갖는 것보다 백 사람이 즐겨 읽는 한 편의 걸출한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까?
물론 동의할 것입니다. 예술 작품은 그 생명이 양이 아니라 질에 있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순탄한 것 같지 않습니다.
한두 편의 작품만 가지고 세상과 대결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소월이나 지용처럼 몇 편의 작품만 가지고 문학사에 남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문단은 엄청난 시인들에 의해 엄청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소수의 작품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잡화상 같은 시의 점포가 아니라 개성이 있는 시의 전문점을 개설하는 일입니다.
거기에 당신만의 상표가 달린 작품을 진열해야 합니다.
당신의 상표가 있습니까? 당신의 상표가 달리지 않는 상품을 당신의 상점에 진열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당신의 이미지를 흐리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당신의 상표가 없다면 어서 깊이 파고 들어가 시의 광맥을 하나 찾아내십시오.
당신의 남은 생애를 즐겁게 투여할 수 있는 당신만의 세계를 찾아내십시오.
이러한 충고를 하고 있는 나 역시 평소 음풍농월이나 신변잡타령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건필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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