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지구를 받은 바보

운수재 2009. 6. 12. 06:01

 

 

 

지구를 받은 바보/                               임보

 

 

 

한 바보 사내가 새벽에

마을의 뒷동산 부엉이 바위에 올라

허공에 몸을 들어 올린 뒤

지구를 향해 돌진했다

그의 머리에 부딪힌 지구가

잠시 회전을 멈추고 움칠했다

 

이윽고 지축이 흔들리며

그 여진의 파문이 파도처럼 번져

산과 들을 넘고

강과 바다를 건너

세상의 잠을 깨웠다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은 경악했다

피가 끓는 젊은이들은 울분의 눈물을 흘렸고

덫을 놓았던 무리도 꼬리를 움츠리고 잠시 숙연해졌다

간악한 패들은 그 속에서도 이해타산의 머리를 굴리고

배가 나온 족속들은 코웃음을 날리며 술집을 돌았다

 

가난한 농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상업고등학교 학력의 민권변호사로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운 정치인으로

서민들을 위한 개혁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의 투쟁

영욕의 회오리 속에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은퇴해서 고향 마을에 내려온 그를

세상은 가만히 놓아두질 않았다

날마다 수천 명의 민초들이 그의 대문을 두드렸고

그를 추종한 수백만의 젊은이들이 매일

인터넷을 통해 끼리끼리 웅성거렸다

때로는 거리로 나가 촛불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스크럼을 짜고 아우성을 치기도 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바보의 적들은 발본색원(拔本塞源)을 서둘렀다

그래서 그물을 치고 투망을 던졌으리

고기 없는 강물이 없듯

돈이 안 돈 정치판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을 옭아맨 그물이 서서히 죄어오자,

걸린 덫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다고 판단한

시대의 풍운아 바보 정치인은 드디어

최후의 승부수

건곤일척(乾坤一擲),

세상을 내던졌다

 

뿔 없는 그의 머리가 지구를 받자

산하가 잠시 허공에 떴다

그리고

그의 으깨진 몸을

대지가 다시 그의 품에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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