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 시선

[스크랩] 임보 시집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에서 2

운수재 2009. 10. 31. 06:34

 

 

   임보 시인 

   시집 <푸른 가시연꽃>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0 - 사랑을 묻는다면 / 임보

 

 

누가 사랑을 묻는다면
황홀이라 대답하겠어요

다시 황홀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님의 이름을 대겠어요

다시 님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온 세상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래도 모르겠다 하면
우리를 보라 이르겠어요.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2 - 이별의 노래 / 임보

 

 

가시리잇가, 가시리잇가
나를 버리고 진정 가시리잇가

나를 버리고 가시다가
오리도 못 가 발병 나면 어이해

억수나 장마를 불러다가
석 달 열흘만 붙들어 볼까나

가마꾼 마부꾼 다 몰아내고
대동강 나룻배 다 묶어둘거나

차라리 시여디어 범나비 되야
가시는 족족 따라 나설거나

가시는 걸음 걸음 밟고 가시라고
진달래꽃 아름 꺾어 깔아드릴거나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4 - 떠나간 자리 / 임보

 

 

황량한 가을 들판에 남아있는 빈 그루터기일레
추수의 아픈 낫에 머리가 다 잘린

된서리 허옇게 내려앉은 모과나무 빈 가지일레
지난여름 풍성했던 꿈의 열매들 다 뜯기고 만

요란한 잔치가 끝난 집의 빈 뜨락일레
부엌엔 불이 꺼지고 잿더미만 바람에 흩날리는

가을 숲 속 어느 멧새가 남겨 놓은 빈 둥지일레
마른 나뭇가지에 소소히 바람만 드나드는

제왕을 잃은 빈 궁궐일레
당신이 없는 이 방은

아, 사랑의 파장에는
주정꾼도 없이 이리 적막한가

그러나
여기저기 당신의 체취가 아직 배어있습니다
당신이 만지던 옥합
당신이 마시던 찻잔

남은 그 향기가
나를 연명케 합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5 - 기다리는 마음 / 임보

 

 

행여나 되오실까,
끼니마다 밥을 지어 빈 상을 차려놓습니다

아마도 오실 거야
아침마다 옷을 다려 시렁에 걸어둡니다

이른 아침 까치 소리에 온 종일 서성이고
열 두 새 가는 무명 다듬이로 날을 샙니다

꿈에서나 보자 하고
침소에 들지만

창 너머 밝은 달만
웃고 지나갑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6 - 내 마음도 가을입니다 / 임보

 

 

내 안에도 낙엽이 집니다

내 안에도 바람이 붑니다

내 안에도 서리가 내립니다

내 안의 북녘 하늘에도
짝 잃은 기러기가
밤새워 울며 날아갑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8 - 한로(寒露) / 임보


연지볼만 지워 놓고
옷고름만 풀어 놓고
천 리 밖 가신 님아
보름달만 걸어 놓고

산이 앓는 소리도 들으리
강물이 보채는 소리도 들으리
이 스산한 가을
우리들의 빈손이 외로울 때

은하의 별들도 애를 태우네
기우는 달도 속을 끓이네
산 넘고 물 건너 밤길 가시는가
그대 도폿자락에 이슬 맺히겠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29 - 비원(悲願) / 임보


씀바귀 쓴 잎으로 독한 술을 빚어
석 달 열흘쯤 마시고 싶어요

앵속각(罌粟殼)* 천 개에 칼집을 내어
한 십 년 아편에 묻히고 싶어요

그래도 이 마음 풀리지 않으면
화냥년 가운데 화냥년 되어

천하에 뭇 사내놈들 다 울리면서
팔도 강산 떠돌고 싶어요

그러다 어느 날 님이 보시면
검은 재로 폭삭 주저앉고 싶어요

* 앵속각 : 양귀비 열매의 껍질.

   칼집을 내어 얻은 액이 아편의 재료가 됨.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1 - 허공에 쓰는 편지 / 임보

잎들은 다 지고
빈 가지마다 바람입니다
님이여,
이 겨울 밤 거처는 춥지 않은지
내의는 두터운지
즐기시던 청국장은 드시는지
궁금합니다
동치미 혼자 헐 수 없어
아침마다 김칫독만 다독입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2 - 불타는 청산 / 임보

 

청산이 타네
청산이 타네
불타는 저 청산을 어이할거나
타고나면 재가 될 걸 어이할거나
새봄 되어 잿무덤에 싹이 돋아도
그 청산은 아닐 것을 어이할거나.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3 - 님의 곁 그 사람 / 임보


님의 곁 그 사람은 갸름하나요?
님의 곁 그 사람은 상냥하나요?

님의 곁 그 사람은 벙어리였으면
사랑한단 말 한 마디 묻어만 두게

그래선 안 되겠네,
참 그래선 안 돼

님의 가슴 터지면 어이 하라고
님 계신 곳 어딘지 알도 못한 걸

 

 

  

 

푸른 연꽃의 노래 35 - 먹기러기 / 임보

 

지난밤 화살 비에 잎들은 다 지고
온 산천 수런수런 떨고 있는데
서리 하늘 저 기러기 먹기러기야
정든 님 가신 곳 어이 알아서
구름바다 넘고 넘어 울고 가는가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6 - 그리움은 꿀입니다 / 임보

지상에서 겨우 이레를 울기 위해
매미의 유충은 암흑의 땅 속에서
칠 년을 참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본성을 깨치는 한순간을 위해
수도승은 십 년을 토굴 속에 묻혀
면벽좌선의 고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든 매미가 다 부화되어 날개를 얻고
모든 고행승이 다 성불하는 건 아닙니다

님이여
이 몸은 이미 한철 님을 누렸거니
이 그리움의 고행은 차라리 꿀입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7 - 겨울 연가 / 임보

이 겨울밤 어디에
눈이 내리겠네

내리는 눈 속에
그대 잠들겠네

고운 잠 꿈결마다
피는 동백꽃

동백길 천만 리로
내 무너져 눕겠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8 - 무적의 불길 / 임보

떨어져 있으므로 더욱 강해진다던 말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계실 땐 못 느끼던 그리움의 불길이
밤낮으로 제 가슴을 때웁니다

어느 물로도 끌 수 없고
어느 술로도 재울 수 없는
무적의 그 불길
이 몸 속에 지피시려 떠나신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님이여, 부디
이 춥고 추운 삼동
그 불길 늦추지 말고
이 몸 훨훨 다 태우소서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39 - 적막 일기 / 임보

천지가 눈으로 아득합니다
길짐승 날짐승 다 끊이고
찬바람만 허공을 뜯고 가지만
가슴에 새겨 주신 더운 흔적들로
이 겨울 밤마다 살을 뎁니다

 

 

 

 

푸른 가시연꽃의 노래 40 - 끝 노래 / 임보


적막강산 놀빛에 젖어
벽공을 뚫고 나는 한 마리 여치

삭풍 몰아치는 설원 만리
눈 속에 돋아난 한 그루 매화

허공에 굴을 파고
석불을 세웁니다

차돌에 불을 붙여
연꽃을 피웁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임보 시인

카페    <자연과 시의 이웃들> http://cafe.daum.net/rimpoet

블로그 <시인의 별장> http://blog.daum.net/rimpoet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동산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