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신문을 말린다 임보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려다가
젖은 신문 뭉치를 본다
종이박스에 넣어 현관 밖에 내놓았던 것이
지난밤 내린 비에 흠뻑 젖었다
그냥 버릴까 하다가 한참 들여다본다
빗물에 익사한 활자와 영상들이 측은하다
박스 안에서 들어내 한 장씩 펼쳐 놓는다
현관의 계단에서부터 베란다에
마당의 화초들 위에도 얹는다
향나무, 사철나무, 회양목
모란꽃 봉오리 위에도 걸친다
차의 보닛, 지붕, 유리창에도 도배를 한다
집안이 온통 젖은 신문지로 뒤덮였다
세상을 뒤흔들던 거창한 사건들이
세상을 주름잡던 거대한 인물들이
서로 달라붙어 죽을 쑤고 있다
어제와 그제가 공존하는 초현실
이편과 저편이 아무런 거부도 모르고 뒤엉켜 있다
전쟁의 포연도
주식의 등락도
아메리카도 아라비아도
잘 나가는 배우도 운동선수도
모두다 혼음처럼 떡이 되어
숨막혀 죽겠다고 아우성들이다
신문을 젖게 한 것은 세상을 망치는 일이다
나는 왜 젖은 신문을 말리고 있는가?
뜰과 마당을 서성이며
한나절 내내 이놈 저놈을 뒤집어대면서
말린다고?
그러나 원상회복이 절대 불가능한 이 도로(徒勞)를
나는 왜 굳이 이렇게 하고 있는가?
그것은 뭉개진 것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내 자신에 대한 벌(罰)이다
엊저녁 늦게 귀가했을 때
내리는 몇 개의 빗방울을 맞고 들어오면서
현관의 외등 불빛에 분명 보았다
거기 신문을 담고 있는 박스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도 그냥 현관문을 닫고 들어왔다는 사실―
그 비겁이 오늘 아침 머리를 들었다
신문을 말리는 것은 내 비굴을 말리는 것이다
기라성 같은 이름도 다 으깨지고
불세출의 얼굴도 다 뭉개지고
말썽 많은 말들도
화사한 광고 사진들도 다 떡이 된
젖은 신문들을
대관령 덕장에 황태를 걸 듯
나뭇가지에도 걸쳐놓고…
젖은 신문을 말리는 것은
나를 말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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