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

딱주

운수재 2011. 5. 10. 11:43

 

 

딱주*

                                            임보

 

 

 

 

아마 예닐곱 살 되던 해쯤이었으리라

싹들이 싸목싸목 돋아나기 시작한 이른 봄에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뒷동산에 오르셨다

그분은 내게 딱주라는 풀을 일러주시면서

열심히 그 뿌리를 캐서 바구니에 담았다

 

 

윗마을 한 부인이 지나다 무얼 하시는가 물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허리를 펴시더니 큰 목소리로

"아, 글씨 이놈이 제 에미 팔다리 아프당께

딱주 캐다가 몸보신 시키자고 안 허요."

"그놈 참 어린 것이 효자요 잉"

 

 

그 부인이 올라간 뒤 할머니께 따졌다

내가 그러지도 않았는데 왜 거짓말을 하셨냐고

그랬더니,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네가 말 안 해도 네 마음 내가 다 안다 하시며

딱주만 계속 캐고 계셨다

 

 

공부 핑계로 타국에 떠나가 있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조부모님 모시고 가솔을 먹여 살리려

밤새워 손재봉틀을 돌려 삯바느질을 하셨는데

갸륵한 며느리의 허약한 몸을 생각하며

할머니는 손자를 데리고 딱주를 캐러 가셨으리라

 

 

한데 참 안타깝기도 하다

그때 할머니께서 그 부인에게 했던 그 말씀이

실은 나 들으라고 했던 것임을 이제야 깨닫다니

저 놈이 제 에미 잘 보살피지 못할 걸 염려하시어

그렇게 미리 깨우쳐 주려고 하신 말씀이었는데

 

 

불효막심한 청맹과니 멍텅구리 이놈,

조모님도 어머님도 다 떠나시고

수십 성상이 지난 뒤 이제사 그 말씀을 깨우치다니

이른 봄 땅을 뚫고 돋아나는 싹들이 딱주만 같아,

아니, 할머니 말씀만 같아 제대로 바라볼 수가 없다

 

 

 

     * 잔대라는 약초를 전라도에선 딱주라고 부른다

 

 

 

 

'신작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의 잠  (0) 2011.06.27
춘분시  (0) 2011.06.12
후대전화 문자  (0) 2011.05.09
댓글  (0) 2011.04.01
지상의 강자  (0) 2011.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