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감상

서정주의 「영산홍(映山紅)」

운수재 2005. 6. 6. 09:42


서정주의 「영산홍(映山紅)」/   임보

    영산홍 꽃잎에는
    山이 어리고

    山자락에 낮잠 든
    슬픈 小室宅

    小室宅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山 너머 바다는
    보름사리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서정주「映山紅」전문


  시「영산홍」은『文學』(1966.11.)에 발표된 뒤, 시집『冬天』(1968.11.)에 수록되어 전한다. 미당이 1915년 생이니 지천명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들어 쓴 작품이다. 전 5연으로 이루어진  2행시인데 7·5조의 율격에 담긴 아름다운 소품이다. 얼른 보기엔 별로 대단한 작품 같지 않지만, 자세히 읽어보면 서정의 구조가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알게 된다. 쉽게 이해되는 작품이 아니다.

 제1연 시작부터 잘 풀리지 않는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의 정경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 작은 영산홍 꽃잎에 어떻게 산이 어린다는 것인가. 산 그림자가 영산홍 꽃잎에 드리운다는 표현인가. 그러나 이러한 상상은 별로 흡족하지가 못하다. 그러면 어떤 정황을 그렇게 그리고 있단 말인가.

 영산홍의 한자 표기 '映山紅'의 '映'은 '비추다, 비치다, 덮어 가리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그러니 '映山紅'이라는 말은 '산이 어른거리며 비치는 빨간(紅) 꽃'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아마 그랬으리라. 그러나 이 구절이 이런 단순한 이미지만을 서술하는 데 그쳤다면  별로 대단할 것도 없다. 이 구절은 제2연으로 이어지면서 복합적인 의미망을 새로이 형성하게 된다. 우선 제2연을 살펴본 다음 그 복합적인 의미망을 따져보도록 하자.

 제2연은 산자락에 낮잠 든 슬픈 소실댁을 제시하고 있다. '슬픈'으로 미루어 보아 그 소실댁은 아마도 님의 사랑을 이젠 제대로 받지 못한 불행한 여인으로 짐작된다. 간밤에 이제나저제나 혹 님이 찾아올까 잠 못 이루며 전전반측 기다리다 지샜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지금도 님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낮잠 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산자락'의 그 '산'은 님의 상징물로 볼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제1연에서의 산도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이 역시 님의 상징어로 본다면 영산홍은 여인 곧 소실댁이 된다. 영산홍처럼 아름답고 젊은 소실댁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므로 제1연은 겉으로는 영산홍을 그린 것 같지만, 사실은 님 생각에 젖어 있는 아름다운 한 여인을 거기에 포개어 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시의 은근한 감춤의 멋이 있다.

 제3연에서는 대상을 바꾸어 툇마루에 놓인 요강을 등장시킨다. 원래 요강이 놓일 장소는 은밀한 방안이다. 그런데 지금 이 요강은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마루에 나와 있다. 그것도 원마루에 잇대어 달아낸 툇마루다. 툇마루는 잉여적 공간이다. 마치 본부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덧붙어 둘째 아내로 살고 있는 소실댁과 흡사한 처지다. 잉여적 공간에 방치된 요강은 다름 아닌 님의 사랑으로부터 소외된 소실댁을 상징한다. 여기서의 요강은 T.S.엘리엇이 말한 객관적 상관물의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으리라.

 제4연부터서는 이제까지 전개해 오던 소실댁 주변의 정경과는 달리 시선을 180도 돌려 엉뚱하게 바다를 끌어들이고 있다. 보름사리는 보름 무렵의 조수 곧 가장 충만한 만조(滿潮)를 이루는 시기다. 제5연은 소금 발이 쓰려 우는 갈매기를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당황하게 된다. 도대체 갈매기 얘기는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우리가 이해해 온 의미구조로 본다면 갈매기도 분명 무엇을 상징하고 있을 것 같다.

 우선 갈매기가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이유를 생각해 보도록 하자. '소금 발이 쓰리다'는 것은 발이 소금기에 절여서 아프다는 뜻이리라. 왜 소금기에 절였을까. 바닷물에 자주 드나들었기 때문이리라. 밀물을 타고 몰려오는 고기떼들을 잡아먹기 위해 정신없이 바다에 발을 담그다 보니 절었으리라. 그러니 여기서의 갈매기의 울음은 괴로워서라기보다는 즐거운 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갈매기의 정체가 떠오른다. 갈매기는 곧 님이 아니겠는가. 소실댁은 돌아본 척도 않고 외지에 나가 여성편력에 여념이 없는 님을 물고기 사냥에 빠져있는 갈매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의 의미 구조는 제3연까지 각 연의 제1행과 제2행이 배경과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와는 달리 제4연과 제5연에서는 연 단위로 배경과 대상이 나뉘어 있다. 그러니 의미 구조로 본다면 제4, 5연은 한 부분으로 묶일 수 있어서 전체 작품은 기승전결의 4단으로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3연까지는 앞말의 꼬리를 이어받는 연쇄구조인 것도 재미있다. 행 단위로 ㅅ, ㄴ, ㅈ, ㅂ 등이 빚어낸 압운적인 효과도 조화롭다. 한 여성의 애잔한 삶을 아름답게 승화기킨 작품이다. 미당의 많은 작품들 가운데 유수한 수작의 하나로 평가할 만하다.

                   *                                  *

 미당은 산문 「영산홍 이야기」에서 이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는데 재미있다. 그는 이 작품을 쓸 무렵까지도 영산홍을 잘못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소학교 시절 친구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한때 승지의 소실이었다. 그 집 뜰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기에 그 꽃의 이름을 물었더니 영산홍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山丹)이었던 것을 쉰이 넘어서야 알게 된다. 그러면서 그는 잘못 아는 것이 때로는 괜찮은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변명한다. 사실 미당은 어렸을 때 보았던 그 빨간 산단꽃과 친구의 젊은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썼을 것이다. 만일 그 꽃의 이름이 영산홍이 아니라 산단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이 작품의 첫 연과 같은 구절은 얻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작품 「영산홍」은 아예 탄생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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