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의 「절대고독」/ 임보
김현승(金顯承, 1913∼1975) 시인을 두고 흔히 '고독의 시인'이라고
일컫는다.
그의 생전에 간행된 5권의 시집(『金顯承詩抄』(57)『擁護者의 노래』(63)『堅固한
孤獨』(68)『絶對孤獨』(70)『김현승시전집』(74)) 가운데 '고독'의 이름을 달고 있는 것이 2권이나 되는 것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고독과
친근하게 살았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목사를 아버지로 둔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고(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수학) 또한
기독교 학교(광주 숭실중학 및 숭전대학)에서 봉직하였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지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 드리워진 존재의 외로움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그는 신에게 순종하면서도 때로는 회의에 젖어 외로움의 노래를 자주 읊조렸다.
1) 나는 이제야 내가 생각하던/ 영원의 먼
끝을 만지게 되었다.//
2) 그 끝에서 나는 눈을 비비고/ 비로소 나의 오랜 잠을 깬다.//
3)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영원의 별들은 흩어져 빛을
잃지만,/
내가 만지는 손끝에서/ 나는 내게로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오는/
따뜻한 체온을 새로이
느낀다./ 이 체온으로 나는 내게서 끝나는/
나의
영원을 외로이 내 가슴에 품어 준다.//
4) 그리고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을/
내 손끝에서 이제는 티끌처럼 날려 보내고
만다.//
5) 나는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을/
내 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지며
어루만지며/
더 나아갈 수도 없는 나의
손끝에서/
드디어 입을 다문다――나의 시와
함께.
---―「절대고독」전문
인간은 고독을 자각할 줄 아는
존재다.
우리들의 곁에 체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가족이 없을 때 우리는 고독을 느낀다.
나를 사랑해 주는 연인이나 나를 감싸줄
친구를 잃었을 때 우리는 고독을 맛본다.
세상이 나를 알아주지 않을 때, 혹은 내가 선택한 길이 다른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다를 때 또한
우리는 고독을 체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유의 고독들은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나는 보편적인 고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제재가
되고 있는 고독은 그런 일상적 고독과는 성질이 다르다.
그래서 그 고독의 이름을 '절대고독'이라고 붙였으리라.
그 고독은 이
지상의 어떠한 고독들과도 비교되지 않는 절대 유일한 고독이다.
그 절대 유일의 고독은 어떤 것인가.
모든 삶의 의미는 죽음 때문에 드러난다.
생명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은 그만큼 더 소중하게 부각된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있다면 그것처럼 큰 형벌은 없으리라.
그렇기는 해도 역시 '죽음'을 생각하면 허전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다.
한평생 쌓아올린 세계에 대한 인식의 내용들이 한순간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아쉽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오감이 다
닫친 채 광막한 어둠 속으로 우리의 육신이 무너져 내리는 정황을 상상하면 소름이 돋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종교는 죽음이 몰고
오는 그런 허전하고 아쉽고 외로운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진정제다.
그러나 그 진정제도 우리를 충분히 위로하고 감싸주지는
못한다.
김현승의 '절대고독'은 바로 그 죽음 앞에서 느끼는 유한자 인간의 외로움이다.
제1연의 '영원의 먼 끝'은 곧 개인의 생명이 끝나는 지점 '죽음'이다.
생명체에게 있어서 영원은 없다. 그래서 그 '유한'을
'영원의 끝'이라고 표현했으리라.
제1연에서 화자는 죽음의 인식에 이른다.
그리하여 제2연에서 화자는 영생이라는 그 동안의 미망(迷妄)의 꿈으로부터 벗어난다.
제3연의 '영원의 별들'은 세계 곧 객체(사물)를 미화한 은유인데
이들 역시 나의 종말과 함께 나에게는 무의미한
존재들이니까 '빛을 잃는다'고 했으리라.
그러나 화자는 생명의 유한을 인식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육신에 대한 애착을 새로이 느끼게
된다.
제4연은 자신의 작품 활동에 대한 허무감을 피력하고 있다.
'꿈으로 고이 안을 받친 내 언어의 날개들'이란
기대와 동경으로 가슴 설레며 아름다운 상상의 날개를 펼쳐 엮어 냈던 작품들이다.
그런데 화자는 자신의 부재(손끝, 죽음)와 함께 이제
이들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제5연 '내게서 끝나는 아름다운 영원'은 내 생명과 함께 종말을 고하는 아름다운 내 생애라고 해도 좋으리라.
유한한
자신의 인생에 화자는 끝없는 연민의 정을 느끼며(주름잡힌 손으로 어루만짐) 또한 언어의 한계성에 절망한다.
시로도 위로 받을 수 없는
절대고독의 외로움 속에 사로잡히고 만다.
실로 비장한 정황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철학자는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두려움의 이유를 몇 가지로 나열한 바 있다.
즉
①죽음의 세계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②죽음이 찾아오는 때를 알 수 없다.
③자신의 죽음의 몫을 남에게
전가시킬 수 없다.
④지금까지 죽음에 예외자는 없다.
언제 어느 곳에 문득 사신(死神)이 나타나서 그 미지의 광활한 어둠 속으로 나 혼자만을 외롭게 끌고 갈는지 예측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그래서 예로부터 현인들은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문제를 생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더러 고승들
가운데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다스리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실로 지난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거기는 온 우주를 아깝지 않게
내동댕이칠 수 있는 초탈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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