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감상]
이육사의 「아편(鴉片)」/ 임보
나릿한 남만(南蠻)의 밤
번제(燔祭)의 두렛불 타오르고
옥(玉)돌보다 찬 넋이 있어
홍역(紅疫)이 발반하는 거리로 쏠려
거리엔 「노아」의 홍수(洪水) 넘쳐나고
위태한 섬 우에 빛난 별 하나
너는 고 알몸동아리 향기(香氣)를
봄바다 바람 실은 돛대처럼 오라
무지개같이 황홀(恍惚)한 삶의 광영(光榮)
죄(罪)와 곁들여도 삶직한 누리.
―---「아편」전문
『원본이육사전집』(집문당,1986)에 수록되어 있는 이육사(1904∼44)의 현대시는 총 33편에 지나지 않는다.
별로 많지 않은 양의 작품 가운데서도 「절정」「광야」「청포도」등은 익히 알려진 수작들이다.
「아편」은 아직 우리에게 친숙하진 않지만 앞의 작품들 못잖은 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아편」은 1938년 『批判』지에 발표되었다.
소품이지만 시의 날과 결의 구조가 만만치가 않다.
우선 차근차근 정독을 하면서 행간의 의미를 들추어보도록 하자.
제1연은 야만인들이 살고 있는 남쪽의 나른한 여름 밤, 번제(燔祭)의 불이 타오르고 있다.
번제는 유대인들이 짐승을 통째로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일종이다.
'두렛불'의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두레'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집단적으로 치르는 행사처럼 보인다.
어떤 성스러운 의식이라기보다는 흥청댐의 야만적인 잔치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국적인 정서가 어린 낯선 정황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배경을 굳이 이국으로 추정치 않아도 될 것 같다.
은유적 표현들이 작품 전체를 주도하고 있는 경향으로 미루어 '남만'과 '번제'도 은유일 가능성이 높다.
무더운 여름 밤, 환락의 불빛에 타오르는 도시가 화자에게는 낯선 이방으로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제2연의 제1행은 '찬 넋'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그 '찬 넋'의 가치를 화자는 '옥'이라는 보석을 끌어다 비유함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어쩌면 시적 화자가 지닌 아직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정신을 이름이리라.
제2행에서는 홍역이 발진하는 거리가 제시된다.
('발반'이 '만발'로 표기된 이본(異本)들이 있으나 이는 작자의 의도라고 판단되지 않으므로 원본을 따라 이해키로 한다. 피부에 반점이 돋는 것을 '발반(發斑)'이라 한다.)
열병이 창궐하는 시가지― 이는 아마도 속된 욕망에 병들어 퇴폐해 가는 시중을 그렇게 상징한 것이리라.
그런데 찬 넋이 홍역의 거리에 쏠린다는 것은 무엇일까.
너무 차가워서 열병의 더운 거리에 나가 잠시 덥히겠다는 것인가.
아무튼 정신이 세속을 엿보고 있다. 예삿일이 아니다.
제3연 제1행은 거리의 정황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화자는 말세를 향해 달려가는 흥청거리는 거리를 '노아의 홍수'로 은유하고 있다.
온 세상을 삼킬 것 같은 무서운 물결이다.
바야흐로 그 홍수에 잠기려는 위태로운 섬이 하나 있고, 그 섬 위에 한 개의 빛나는 별이 제시된다.
그 별이 화자가 성취하고자 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 별을 향해 달려오라고 소리친다. 이것이 제4연의 내용이다.
'알몸동아리 향기'란 체취가 아닌가.
체취를 날리면서 바람 만난 봄바다의 돛대처럼 달려오라고 보챈다.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제3연의 '별'은 어떤 '소망'이나 '목표' 같은 것을 표상하는 상징물이기보다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지칭한 은유로 보인다.
화자의 사랑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봄바다'를 어떤 이본에서는 '봄마다'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오식으로 판단된다.)
제5연은 삶의 환희를 무지개같이 황홀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비록 죄와 결탁한다고 해도 이 세상은 살 만하다고 한다.
제5연의 '황홀'과 '죄'는 제4연의 '알몸동아리'와 무관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
'넋'이 '몸뚱이'를 만난 합환(合歡)의 환희다.
육사의 도덕적 자아는 이를 죄로 인식하면서도 허용한다.
아니 그것을 통해 화자는 세상살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게도 된다.
여기에 지사로서의 육사가 아닌 한 생명체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성과의 교합―합환(合歡)은 이 지상에서 생명체가 체험하는 것 중 가장 황홀한 즐거움이다.
신은 양성의 결합에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도록 설계하면서 그 '쾌락'을 결합의 매재(媒材:수단)로 제공한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누가 서로 거추장스럽게 결합하여 씨를 만들려 하겠는가.
보통의 생명체들은 필요한 때만 교합하여 즐거움을 누린다.
그런데 교활한 인간은 그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때도 교합한다.
수단인 '쾌락'을 목적으로 삼아 신의 의도와는 달리 성의 즐거움을 남용하며 살아가고 있다.
머지 않아 인간들에게 신의 큰 벌이 내릴진저.
근자에 발병하기 시작한 에이즈라는 것이 어쩌면 그 형벌의 징조인지도 모른다.
육사의 도덕적 자아는 유희적인 정사에 대해 죄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떨치기 힘든 성적인 욕구를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아편의 중독자가 그 황홀경을 잊지 못하여 아편을 쉽게 떨쳐 버리지 못하듯이 인간들은 성의 환락에 사로잡힌 성중독자들이다.
아편은 다름 아닌 성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편」은 관능적인 욕구를 고도의 은유와 상징을 통해 승화시킨 수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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