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보시집들/장닭설법

몽화/ 임보

운수재 2007. 6. 3. 06:35

 

 

 

몽화(夢禍) /  임보

 

 

지난밤엔 요정들의 나라에 빠져 들어갔다. 세상이 온통 백화난만한 봄 동산인데 오색 고깔을 쓴 요정들이 올챙이 새끼들처럼 우글거리고 있다. 어떤 놈은 배꽃처럼 희고 어떤 놈은 도화처럼 붉다. 기왕에 이렇게 되었으니 마음에 드는 놈 하나 골라잡으려니 하고 손을 뻗치면 곧 잡힐 듯 잡힐 듯 하다가도 이내 도망쳐 가며 뒤돌아보고 웃는다. 이 무슨 기갈스런 봉변이란 말인가.

 

또 지난밤엔 산도적들의 소굴에 붙들려 갔다. 높은 성채의 벼랑 위에는 해골을 그린 검은 깃발이 펄럭이고 봉두난발의 무리들이 불개미 떼처럼 와글거리고 있다. 광장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통돼지를 구워가며 술을 마시고들 있다. 두목의 앞에 끌려간 나는 얼마 안 있어 참수형을 당하기로 되어 있다. 이 무슨 청천의 날벼락이란 말인가. 헌데 가만히 들여다봤더니 두목의 얼굴이 눈에 익다. 어디서 봤더라. 옳지 그놈이 아닌가.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한 바로 그 악당 그놈이다.

 

또 지지난 밤엔 성인(聖人)들의 세상에 끌려 들어갔다. 눈처럼 흰 맑고 눈부신 세상인데 모두가 다 노인들뿐이다. 치렁치렁 도복을 걸친 백발의 노인들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서 부채질을 하고 있다. 주위를 어정거려도 누구 하나 나를 향해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없다. 도대체 이 노인들은 무슨 재미로 살아가고 있단 말인가. 하루 종일 이들과 함께 지낼 일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다.

 

꿈들을 깨고 나서 곰곰이 생각을 해 본다. 내 무슨 욕망의 그물에 사로잡혀 그처럼 고된 꿈들을 엮었단 말인가. 요정들의 나라는 너무 어지럽다. 성인들의 나라는 너무 무료하다. 도적들의 나라는 너무 무섭다. 그래도 내 체질에 가장 지낼 만한 곳은 적당히 괴롭고 무던히 짭짤한 이승의 삶인가 보다. 오늘밤엔 또 어느 나라에 붙들려 가 곤욕을 치르게 될는지 모를 일이로되, 만약 꿈의 신[夢神]이 있어 내 소원을 들어준다면 내 이르리라. 내 열서너 살 적 그 산과 들판으로 되돌려 보내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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