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美女) 콘테스트 / 유공희
그리스의 서사시인(敍事詩人) 헤시오도스에 의하면, 미(美)의 여신 비너스는 바다의 거품에서 탄생하여 부드러운 서풍에 불리어 큐프로스 섬에 닿자, 계절의 여신들이 엷은 옷을 입혀서 신들의 세계로 인도하였다고 한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바로 이 헤시오도스의 신화를 소재로 삼은 그림이다.
긴 금발을 바람에 휘날리면서 커다란 가리비 껍질 위에 서서 계절신의 영접을 받고 있는 이 비너스의 아름다운 나신은, 신화 속의 허다한 스캔들의 주인공답지 않게 어딘가 우수(憂愁)에 젖은 눈매와 수즙은 듯 약간 모로 눕힌 고개가 마치 청순(淸純) 무구(無垢)한 처녀의 몸매요 표정이다.
허다한 비너스 중에서도 이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그 청순함과 무구함에 있는 것이다.
비너스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있는 것은 저 ‘밀로의 비너스’인 것 같다.
1820년 봄, 에에게 바다의 밀로 섬에서 한 농부가 발견했다는, 저 양쪽 팔이 없는 우아한 반나신의 비너스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파리의 루부르 박물관에 전 인류의 보물로 간직되어 있는 이 미의 여신은 그 두 팔을 어디다 내던졌을까?
아폴리네르 같은 시인이 아니라도 안타까워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디선가 그 한쪽이라도 발견된다면 발견자는 팔자를 고칠 게 틀림없고, 동서 할 것 없이 어수선하기만 한 판국에 참 신선한 뉴스가 되고도 남을 것 같다.
밀로의 비너스는 팔이 없는 불구이면서도 그 균형 잡힌 육체미는 오늘날까지 ‘영원의 여성미’로서의 권좌(權座)를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오만한 불구의 여신보다는 보티첼리의 ‘수줍은 비너스’에서 나의 ‘영원의 여성’을 보며 또 보기를 좋아한다.
내 방의 한쪽 벽에서 이 그림이 늘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원의 여성’이라는 것이 언제부터 예술작품의 테마가 되었는지는 소상히 알 수 없으나, 그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는 중세의 로망스 말고는 괴테의 작품들일 것이다.
‘베르테르’의 롯테로부터 ‘파우스트’의 헤레나에 이르기까지 ‘영원의 여성’은 괴테 문학의 한 라이트 모티브가 되어 있는 감이 있다.
괴테의 문학에서 ‘여성’을 제거해 버리면 황량한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그의 천사들은 ‘영원의 여성이 우리를 인도한다’고 노래한다.
미술 작품으로는 다 빈치나 라파엘이 그렇게 많이도 그렸던 ‘마돈나’가 모두 ‘영원의 여성’이 아니고 무엇일까?
성모 마리아가 미학적으로 볼 때 비너스의 변신이라면 모독이 될까?
그런데 세계 문화사의 어느 구석을 들춰 보아도 ‘영원의 남성’이라는 테마가 없으니 웬 일일까?
관심 있는 남성 같으면 매우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한 심리학자가 이 불만을 꽤 시원스럽게 덜어 주고 있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남성의 생리는 모든 여성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데 여성의 생리는 한 남성밖에는 사랑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한 쌍의 부부가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걸어간다. 아내는 숱한 미남자가 지나가는 지도 모르고 오로지 남편에게만 몰두하는데, 야속한 남편은 말쑥하게 생긴 여자가 지나갈 때마다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이론이다.
모든 여성이 관심의 대상이 되면 그 중에서 ‘가장 좋은 하나’를, 천부의 추상(抽象) 작용으로 형성하여 마침내 여성의 ‘이데아’가 결정(結晶)되기에 이르니 그것이 바로 마돈나, 곧 ‘영원의 여성’의 정체라는 것이다.
오로지 나의 ‘그이’만을 일편단심 물고 늘어지는 여성에게 어찌 ‘영원의 남성’이란 이미지가 생겨날 여유가 있을소냐!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괴테라는 사나이는 80세의 노령에 19세의 처녀를 애인 삼았던 ‘고개 돌리기’의 명수였었다.
그러나 이 학설이 영세불멸의 진리냐 아니냐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요즘 세태 같아서는 머지않아 ‘영원의 남성’이 패기 등등하게 탄생하여 비너스에게 도전할 날도 그리 멀 것 같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러나 신들은 이미 죽은 지 오래다. 밀로의 비너스도 이제는 석고 복사판이 수두룩해져서 화공들의 모델이 아니면 방구석의 얼빠진 장식품이 되고 말았다.
신들이 죽었기 때문이리라. 이제는 인간들이 어쭙지않게도 신들의 흉내를 낸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나, 인간들은 ‘앰브로지어’ 대신 밥을 먹고 ‘넥타르’ 대신 콜라를 마시는 미신(美神)들을 브라운 씨 집에서, 나까무라 상 집에서, 김 서방 집에서 골라내기 시작했다.
‘미스 월드’니, ‘미스 코리아’니 하는 것을 뽑아내는 시합이 바로 그것이다.
죽은 신들의 망령이 내려다보면 가슴을 치며 한심해 할 일이 어찌 한두 가지리오마는, 이른바 ‘미인 콘테스트’라는 것을 혹 텔레비젼을 통해 보게 되면, ‘눈요기’ 거리로는 최고가 아니냐는 호색가(好色家) 아닌 바에야, 장내가 온통 생선시장 같은 분위기라는 점을 누구나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각처에서 뽑혔다는 형형색색의 ‘미녀’들이 드레스 쇼를 한바탕 벌이고 나서는 이른바 비키니 스타일로 육체미 시합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젖가슴 둘레 얼마, 허리통 얼마, 엉덩이 얼마 하는 무슨 품평회장 같은 와중(渦中)에서 조화(調和)을 잃었는지는 모르되,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구석이나마 수줍은 빛을 보여 주는 미녀는 거의 없다.
중인환시(衆人環視)의 휘황한 무대 위를 육체의 98%를 내놓고 걸어다니면서 어쩌면 그렇게 씽씽하고 늠름할 수 있는고?
심사위원이란 사람들은 무슨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고, 어디를 어떻게 보고 점수를 매기는 것이며, 혹 수줍어하는 기색이라도 비치면 감점이라도 하는 것인가?
미녀 콘테스트의 동기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이런 풍속은 먹을 것 입을 것이 남아 걱정인 인간들이 꾸미는 말세 풍속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이 미녀 시합의 한 척도가 되는 모양이니 이른바 ‘팔등신(八等身)’이란 게 그것이다. 미의 여신은 기묘한 도량형기(度量衡器)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인습은 뒷골목을 어슬렁거리고 유행은 대로를 활개친다’더니 요즘은 그 미녀 시합이 별스러운 분야에까지 만연되어 자못 장관이다.
우선 여자대학에서 봄철마다 벌이는 ‘여왕’ 뽑기 대회가 그것이다. 여성의 지(智)와 덕(德)을 닦는다는 전당에서 해마다 몸맵시 잘난 미녀를 뽑아내서 어쩌자는 셈인지?
체육을 장려하는 마당에서 운동대회보다도 그쪽이 더 성행하는 것을 볼 때, 모처럼 궤도에 오른 새마을 운동의 하나로 학원에서의 미녀 뽑기를 일소해 줍시사고 당국에 호소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이 필자만의 심정일까?
‘여왕’ 뽑기보다도 더 가관인 것이 있으니, 여러 가지 ‘날’에 또 여러 가지 단체에서 갖가지 ‘비너스’를 마구 뽑는 일이다.
‘미스 눈’ ‘미스 이빨’ 하는 것이라든가, ‘미스 캘린더’ '미스 00은행’ 심지어는 ‘미스 00연고’ 하는 따위가 그것인데, 미녀 시합이 이런 상태로 유행하다가는 나중에는 ‘미스 코’ ‘미스 귀’ ‘미스 손톱 발톱’이 나오고, ‘미스 고무신’ ‘미스 라면’식으로까지 ‘미녀’가 양산되기 시작하면 온천지가 온갖 비너스의 허깨비로 들끓는, 낙원 아닌 터키탕 꼴이 될 것이니 상상만 하여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미인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한줌 흙이 되어 버릴 그 살덩이만 잘 생겨야 미인이라면, 세상에 미인같이 허망하고 슬픈 것이 어디 있으랴?
혹 우연히도 아름다운 육신으로 태어났으면 그 아름다움을 미안해하고 수줍어하는 ‘마음’이 그 안에 뛰고 있어야 그녀는 진실로 미인이 아니겠냐고 나는 모든 ‘미녀’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어느 비너스보다도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티 없는 ‘마음’이 그 육체보다도 더 내 눈에 오기 때문이다. (1973. 수필문학,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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