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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미학 / 유공희

운수재 2007. 7. 16. 09:27

 

거리의 미학  /   유공희

 

이효석의 수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성북동의 포도원. 삼인행. 배경과 인물이 단순은 하나 꿈이 그처럼 풍요한 때도 드물다. 나는 그들의 치마와 저고리의 색조를 기억하지 못하며 얼굴의 치장을 생각해 낼 수 없으나 <그 모든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꺼져버린 비늘구름과도같이 일률로 아름답고 그리운 것이다.> 누렇게 물든 잔디 위에 배를 대고 누워 따끈한 석양을 담뿍 받으며 끝물의 포도빛을 바라보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어떤 몸짓을 가졌던지 한 마디의 대사도 기억 속에 남지는 않았다.

이 추억을 더 한층 아름답게 하는 것은 총중의 한 사람이 세상을 버렸음이다. 나머지 한 사람은 그 뒷소식을 알 바 없다. <영원히 가버렸으므로 지금에 있어서 잡을 수 없으므로 이 한 토막은 한없이 아름답다.> 신비가 있었다. 생활이 빛났다. 지난날의 포도의 맛은 추억의 맛이요, 꿈의 향기다.

 

이 아름다운 글은 필자가 < >에 넣은 부분으로 인해서 더 한층 매혹적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것이다.

거기에는 뚜렷하게 ‘거리의 미학’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좀 야비스러운 상상 같지만 만일 작자가 글 속의 한 사람과 부부가 되어서 살고 있었다면 이런 아름다운 글이 생산되었을 리도 없을 것이요,

‘성북동의 포도원’이 ‘신비’의 무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며,

포도의 맛이 ‘꿈의 향기’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모든 추억이 다 아름다운 것은 신비로운 거리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이 ‘거리의 미학’을 생활 속에서 터득하고 자기의 생활철학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다.

가까이서 보면 밉게 생긴 여자도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는 미인으로 보일 수가 있다.

그래서 팔등신(八等身) 아닌 ‘8미터 미인’이란 말이 생겼다.

이같이 거리의 혜택 속에서 빛을 받는 여성을 노상에서 흔히 보지 않는가!

명승지에 가지 않더라도 원경(遠景)은 어디나 아름답다. 보들레르는 ‘불과 몇 마일 범위의 물이 인간을 영원의 정서로 몰아넣는다’고 바다를 노래했지만 바다의 수평선은 우리에게 탈세속의 신비감조차 안겨준다.

푸른 하늘을 흐르는 구름, 밤하늘을 수놓는 별들은 우리와의 영원한 거리로 인해서 언제나 신비로운 시요, 그림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발자국이 그 고운 얼굴을 쑤세미같이 만들어 놓을 날이 온다 해도 달이 사람에게 주는 정서는 우리와의 그 변치 않는 거리로 인해서 변함이 없을 것이다.

언덕 위에 누워서 흘러가는 구름에, 반짝이는 그 숱한 별들에 언제까지나 마음을 날리며 지냈던 소년 시절의 꿈은 모두 이 신비로운 ‘거리의 미학’에 매어 있었던 것 같다.

‘거리의 미학’은 무엇보다도 생활 속에서 더 깊이 터득되어야 할 것 같다.

스탕달의 『연애론』에 ‘결정작용(結晶作用)’이란 말이 있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의 미점(美點) 선점(善點)만이 무럭무럭 피어나서 애정이 아름답게 결정되어 간다는 이론이다.

늘 붙어서 살면 모처럼 타고난 숱한 선(善) · 미(美)들이 피어나기도 전에 시들어버려 사랑이 무너질 기회가 두 사람을 노리게 될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는 셈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할 것을 맹세하고 따뜻한 축복 속에서 맺어진 한 쌍이 몇 해도 못 가서 이혼한다고 아우성을 치기 전에 이 스탕달의 학설을 한번 머리에 띄울 일이 아닐까?

스탕달은 그 풍부한 경험에서 실감하고 설파한 이론이겠지만, 이것은 스탕달 아니라도 동서고금에 시들지 않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사회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이혼율이 가장 적은 직업은 마도로스라고 한다.

1년에 한 번이나 두 번밖에 못 만나는 한 쌍의 이야기… 그것은(한쪽이 변심만 않는다면) 저 ‘견우직녀’ 다음가는 아름다운 로망스가 아니겠는가!

어떤 종류의 위대한 예술작품은 ‘거리’의 산물일 수도 있는 것 같다.

괴테와 롯데가 결합될 수 있었다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탄생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유명한 단테의 『신곡』이 시인의 평생을 두고 사랑한 베아트리체가 현실적인 애인일 수 없었던 데서 탄생된 걸작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비단 남녀간의 애정에만 그칠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친구끼리 친하대서 너무 자주 만나고 있지 않는가?

드문드문 만나는 데서 그 친함은 더 깊고 짙어질 것이다.

둘 사이의 거리를 지금보다 더 키울 필요가 없을까?

인간 상호간의 모든 정은 귀한 화초를 정성들여 돌보듯 서로가 키우고 가꾸어야 할 것이다.

이런 진리를 모르는 데서 일어나는 갖가지 비극이 생각보다 자주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거리를 함부로 거부하거나 무리하게 좁히려 할 때 사람이 추악해진다는 사실을 나는 종종 보아 온다.

때로는 우리가 체념하지 않을 수 없는 거리도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이는 거리를 거부하고 좁히려고 노력하는 데서 삶의 보람이 생기고 문화 문명도 창조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엄마 등에서 달을 잡으려고 내미는 아기의 손의 의미… 그것이 만물지영장의 원시표징임을 누가 부인하랴.

다만 매사에 한계가 있는 중간자적 존재인 인간으로서 한 번밖에 없는 일생을 좀더 멋있게 살려면 하나의 생활철학이 필요하고 그 중에서도 이 ‘거리의 미학’은 가장 슬기로운 요소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뿐이다.

같은 대자연의 품에서 살아오면서도 서양인은 너무 잡으려고만 해 왔다. 그

러나 그들 중에서도 슬기있는 사람은 잡는 영광보다는 잡는 비애를 더 깊이 깨달았었다.

우리 동양인은 잡으려고 하기보다 멀리 두고 보기를 좋아한다.

멀리 두고 보는 데서 서양인과는 차원이 다른 철학과 슬기가 꽃핀 것이다.

잡히지 않는 것이 값진 것이요, 이미 잡힌 것은 무미하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서양인은 대뜸 얼싸안는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은 멀리서 그윽한 웃음으로 반긴다.

우리 조상들의 이른바 애이불비(哀而不悲)하고 낙이불음(樂而不淫)하고 화이불유(和而不流)한다는 저 은근한 삶의 모습은 모두 이 ‘거리의 미학’을 터득한 생활철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소월(素月)의 꽃은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히 시들지 않는 것이다.

(1973. 여성동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