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시 읽기

봄날 옛집에 가서 / 이상국

운수재 2007. 7. 17. 07:44

 

봄날 옛집에 가서 /   이상국

 

봄날 옛집에 갔지요

푸르디푸른 하늘 아래

머위 이파리만한 생을 펼쳐들고

제대하는 군인처럼 갔지요

어머니는 파 속 같은 그늘에서

아직 빨래를 개시고

야야 돈 아껴 쓰거라 하셨는데

나는 말벌처럼 윙윙거리며

술이 점점 맛있다고 했지요

반갑다고 온몸을 흔드는

나무들의 손을 잡고

젊어서는 바빠 못 오고

이제는 너무 멀어서 못 온다니까

아무리 멀어도 자기는 봄만 되면 온다고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웃었지요

―『유심』(2004 봄)

 

 

[감상 안내] 

 

이 작품은 몇 개의 재미있는 비유로 엮어진 것이 인상적입니다.

화자가 모처럼 노모가 혼자 살고 있는 고향집에 찾아갑니다.

자신의 보잘 것 없는 삶[생]을 ‘머위 이파리’만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머위 이파리도 다 자라면 제법 넓기는 합니다만

토란이나 연잎에 비하면 아주 보잘 것 없지요.

게다가 봄철이라면 아직 제대로 다 피어나지 못 했을 터이니

그 작은 잎을 따서 햇볕 가리개라도 삼는다면 웃길 일입니다.

화자는 자신의 변변치 못한 삶에 대한 불만족을 ‘머위 이파리’를 끌어다

신선하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귀향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하는 군인처럼’이라고 합니다.

제대하는 군인은 군대라는 통제된 제도권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입니다.

어쩌면 사회란 경쟁의 각축장이니 전쟁터와 방불한 곳이라 할 수 있지요.

귀향은 바로 그런 각축장으로부터 잠시 벗어난 것이니

귀향하는 이의 심경은 마치 제대군인처럼 홀가분할지 모릅니다.

한편 ‘제대군인처럼’에서는 ‘가진 것 별로 없이 맨손으로’의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삶이 좀 풍족했더라면 어머님을 즐겁게 해 드릴 그럴 듯한 선물이라도 가져오고 싶었는데

그렇게 할 수 없었던 허전한 형편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빨래를 개신 곳은 ‘파 속 같은’ 그늘입니다.

아마 방안이 아니면 마루에서 빨래를 개고 있을 것이므로

‘파 속 같은 그늘’은 집안의 그늘이겠지요.

파 속 같은 그늘? 여기서 ‘파’는 그늘의 속성을 형용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화자의 심경을 드러내는 말로 보입니다.

파는 알싸한 느낌을 주는 야채입니다.

양파를 손질하다가는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화자는 한평생 가난에 쪼들리며 외롭게 살아온 어머님을 보자

문득 코끝이 아려오는 뭉클한 감정에 사로잡혔을 지도 모릅니다.

 

어머님이 하신 말씀은 늘 한 가지― 돈 아껴 쓰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장래를 생각고 하신 충고라는 것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어머니에게 투정을 합니다.

사내가 가끔 술 한잔 먹는 게 어디 헛돈 쓰는 거냐고―

말투가 살갑지 못한 것을 ‘말벌처럼 윙윙거린다’고 했습니다.

노모에게 불손한 투로 말하는 것도 어리광일지 모릅니다.

 

집 주위에 심었던 나무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이 정겹기만 합니다.

그렇게 자라도록 자주 찾아오지 못한 것이 미안하게 느껴집니다.

일에 쫓기고 또 멀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변명을 해 봅니다.

뜰에 핀 원추리꽃이 소년처럼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습니다.

오는 길이 멀어도 자기는 봄마다 찾아온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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