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의 시

벽 / 유공희

운수재 2007. 9. 13. 09:12

 

 

벽(壁) /   유공희

 

조약돌 도글도글 멀고 먼 전설을 속삭이고

황량한 들에는 이곳저곳 발자욱만 새로워

어느 돌 틈에선지 새빨간 꽃을 잡아 뜯던 날

우리 집 뜰 안에는 낯모를 소녀가 찾아왔노라

 

오, 나의 방 하얀 벽에 처음으로 귀를 대던 날

벽이여, 너는 나에게 얼굴을 보이고 이름을 얻었도다

아침 햇볕이 부챗살처럼 피어오르는 마을 끝에서

보름달빛이 밀물처럼 쏟아지는 하얀 길가에서

 

소녀는 가고 나는 너의 몸뚱어리에 귀를 대었노라

이튿날 너의 몸뚱어리에 귀를 댄 나의 얼굴에

웬일인지 어머니가 울면서 입맞추더니

아버지는 먼 나라의 그림책을 사 주었도다

 

오, 고향을 잃고 헤매이던 낯서른 거리에

저녁 햇살이 갈대꽃같이 피어서

낯모른 담벽이 성(城)처럼 아름다울 때

발을 멈추고 나는 홀로 담벽에 야윈 볼을 문질렀노라

 

조약돌 도글도글 멀고 먼 전설을 속삭이고

황량한 들에는 이곳저곳 발자욱만 새로워

어느 돌 틈에선지 새빨간 꽃을 잡아 뜯던 날

나는 발을 멈추고 벽에 기대이는 그림자가 되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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