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한하운시초 / 이생진

운수재 2007. 9. 28. 14:26

 

韓何雲詩抄  /  이 생 진

 

내 서가에 있는 책을 선벌(選伐)하면서 내 시집을 남들이 가져가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고 어디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도 쓸쓸한 서가를 떠나지 못하는 시집『韓何雲詩抄』(정음사,1949)는 내 처분만 기다리고 있는 듯 아무 말이 없다.

붉은 황톳길이 지나가는 주황색 표지를 열면 스물한 살 때의 낙서가 보인다.

 

서점에 꽂혀있는 다른 시집처럼 한번 얻어 읽었으면 그만인데 돈 없을 때 굳이 이 시집을 사려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내가 이제까지 읽은 시집 중에 가장 아픔을 느끼게 한 시집으로 여겨졌기 때문인가. 그는 붓으로 시를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몸과 그의 우주로 시를 썼다. 그의 아픔이 나의 아픔으로 이어지는 한 그 시집은 내 곁에 있어야 한다. (1950. 2. 14.)

 

韓何雲의 본명은 한태영(韓泰永)이다. 그는 1919년 2월 24일에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쌍봉리에서 태어났다. 이리농림학교 축산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중국으로 가서 북경대학 농학원 축목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연구하다가 귀국했다. 1948년 8월에 월남하여 시집『韓何雲詩抄』(정음사,1949)를 펴낸 다음 방랑생활을 했다. 첫 시집을 내고 6년이 지난 1955년에 人間社에서 두 번째 시집『보리피리』를 펴냈다. 시도 쓰고 나환자를 위해 일을 하다가 1975년 2월 28일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북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도색반점이 사타구니에 나타나 그때부터 ‘사지(四肢) 오초(五梢)의 예리를 잃어버린 문둥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천작(天作)의 심판 앞에 청운의 뜻을 잃고 돌아온 하운은, 남 못지 않던 가세를 병약에 탕진하고 나머지, 오늘 이 유리(游離)의 가두에 서게 된 것이다’(韓何雲詩抄를 엮으면서․이병철).

 

그의 첫 작품 「全羅道 길」외 12편이 잡지 新天地(1949. 4)에 발표됐을 때 나는 이 잡지를 친구가 빌려줘서 읽고 그의 시에 푹 빠지고 말았다. 나병의 병고에서 오는 저주와 비통을 읊어 문단의 주목을 끌었는데 나는 그의 시를 읽고 쇠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순간처럼 어리둥절했다.

이 시집을 사서 책꽂이에 꽂아놓고 4개월 뒤에 6․25의 천벌을 맞았다. 그로부터 5년간은 그의 아픔과 다름없는 나의 아픔이 불어났다. 직장도 잃고 학업도 중단되고 시도 그리움도 생활도 희망도 사라지고 매일 매일이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때 읽고 싶었던 것은 따뜻하고 달콤한 시가 아니라 울화가 터져서 몸부림치는 시였다. 무엇이고 닥치는 대로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아팠다. 울고 싶었다. 죽고 싶었다.

 

그(韓何雲詩抄)는 50년 동안 자기 곁에 모여들었다 다시 자기 곁을 떠난 시집을 보고 생각나는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며 저도 내 곁을 떠날 날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그만큼 시의 세계를 함께 해왔다. 그 시집은 아내보다 8년 일찍 내게로 왔고 내가 이성을 알게 된 3년 뒤에 왔다. 그러나 그리움을 빼앗겼을 때 이 시집을 만나 같이 아파했던 것이다. 아내에겐 더러 화를 내며 살았지만 이 시집과는 한번도 다투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내와 살며 안으로는 시집과 살아온 50년, 이것은 아내도 시인해야 한다. 한 권의 시집이 질기게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무슨 이유인가. 나는 아내와 살아서 세 아이를 낳았고, 이 시집과 살아서 스무 권의 시집을 낳았다.

 

이 시집 속표지에 손가락이 달아난 손바닥이 보인다. 그리고 25편의 시. 불과 69쪽 밖에 안 되는 얄팍한 시집이다. 나는 이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밤새 베껴서 시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보냈다.

6․25를 겪고 서산에서 청양을 지나 공주로 내려가면서도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생각했다. 다음에 명동에서 대대적인 시낭송회가 있었을 때 시골에서 올라와 그 시낭송을 들었다. 양주동 선생은 사회를 보고 있었고 한하운 시인은 문전에서 독자들에게 사인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감격했다.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바로 그 손이었다. 손가락이 없는 그 손. 그 때에도 ‘붉은 황톳길’을 생각했다.

그러고는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가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92년 1월 9일에 소록도를 찾아갔다. 소록도 국립병원 공원 소나무 밑에 있는 그의 시비는 마치 그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새겨진 시,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故鄕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靑山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人寰의 거리

人間事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放浪의 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를 읽으면서도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을 생각했다. 그의 시는 아름다워서 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아파하는 것을 나도 아파하고 싶어서 읽었다. 그 아픔을 나도 아파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내가 걸어다니는 길은 모두 한하운의 ‘황톳길’처럼 여겨졌다.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바닷가의 길도 한하운이 닦아놓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全羅道길. ―「全羅道 길 」전문

 

『韓荷雲詩抄』에 있는 시 25편 중 「全羅道 길」「손가락 한 마디」 「罰」 「목숨」 「데모」 「파랑새」 「꼬오․스톱」 「나」 「봄」 「女人」등, 이 열 편은 나를 울음의 도가니에서 꺼내놓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외오로 도가니 같은 섬에서 섬으로 떠돌게 되었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올시다.

 

사람이 아니올시다

짐승이 아니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億劫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罰이올시다 罰이올시다. ―「나 전문

 

그리고 이런 땐 나도 죽고 싶었다.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季節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번밖에 없는 自殺을 아끼는 것이요. ―「봄 중에서

 

그리고 「女人」에서는 나도 나의 여인을 생각했다. 모두 잃고 나면 모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황톳길’을 걷고 있다.

 

눈 여겨 낯익은 듯한 女人하나

어깨 널찍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나리고 내 옆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직한 저 女人은

뒷모양 걸음걸이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追憶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女人 전문

 

그는 갔지만 시집은 내 서가에 남아 있다. 그도 그의 시집도 말은 하지 않지만 시집을 열면 숱한 그의 말들이 눈물로 번진다. 그런 땐 나도 걷던 길을 멈추고 발밑에 있는 민들레랑 실컷 울어버린다. (우이시 제13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