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스크랩] 내 마음을 움직인 세 편의 시 / 임보

운수재 2007. 9. 29. 10:33

내 마음을 움직인 세 편의 시 /   임보

―세 개의 일화

제1화

내가 시라는 글을 최초로 접하게 된 것은 조부님의 사랑방에서 함께 기거하며 그분으로부터 한문을 익히기 시작한 때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내 나이 네댓 살 적이 된다.

'천고일월명(天高日月明) 지후초목생(地厚草木生)'으로 시작되는『추구(推句)』가 내 첫 번째의 교재였다.

그 책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구주매화락(狗走梅花落)이요
    계행죽엽생(鷄行竹葉生)이라.



개가 달리매 매화꽃이 떨어지고, 닭이 걸으매 댓잎이 돋아난다는 뜻이다.

겨울철 눈이 내려 하얗게 마당을 덮기 시작한다.

그 위를 개와 닭이 흥겨워하면서 걷는다.

그러자 개와 닭의 발자국이 눈 위에 새겨지는데 개의 것은 매화꽃에, 닭의 것은 댓잎에 각각 비유하여 읊은 시다.

그것은 시에서의 기초적인 비유에 불과한 것이지만 당시 어린 내게는 무척 신선하고 흥겹게 느껴졌다.

글이란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제2화

내가 문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나의 모교는 전남 승주군 주암면에 자리한, 한 학년이 겨우 50여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골학교였다.

어느 날 체육 선생님 한 분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오셨다.

짙은 갈색 안경을 쓰신, 이마가 시원스럽게 벗어진 멋쟁이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는 체육 수업을 운동장이 아니라 주로 교실 안에서 진행했다.

명목은 체육 이론 공부라고 했지만 사실은 체육과는 상관없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톨스토이의 「부활」이라든지 토마스 하디의 「테스」와 같은 소설들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춘향전」이나 「심청전」같은 우리의 고전소설 몇 편 정도만 겨우 알고 있었던 나에겐 그야말로 놀라운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세상에 그토록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단 말인가.

당시는 6·25전란 직후라 교과서도 제대로 배급받기 힘들었으니 시골구석에서 문학서적을 구하기란 꿈도 꿀 수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선생님의 전공과목은 체육이 아니라 국어였다.

그런데 체육교사로 부임해 왔으니 당시의 교육행정이 얼마나 무질서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 선생님께서는 가끔 시를 읽어주시기도 했다.

언젠가는 교육 신문에 발표된 당신의 작품을 읽어주셨는데 그 작품을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줄거리는 대개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얼어붙은 들판에 문둥이가 가네
    엄마 문둥이 새끼 문둥이
    뒤뚱뒤뚱 걸어가네
    와락 달려가 껴안고도 싶네. ―정동렬(鄭東烈) 「문둥이」

 


문둥이 가족에 대한 연민의 정을 노래한 이 작품은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글이란 아름다운 것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그런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없을까 생각하면서 매일 밤 일기의 끝에 시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시라고 부를 수 없는 유치한 글이긴 했지만―.

 

제3화

1963년 내가 군에서 제대하여 집에 돌아온 지 닷새만에 와병 중에 계셨던 조부님께서 세상을 뜨셨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녀석 보고 가시려고 그렇게 버티셨던가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듯 싶었다.

초상을 치르고 난 며칠 뒤 조부님의 유품을 정리했다.

서책들을 정돈하면서 그분의 유묵(遺墨)들을 찾아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내 어렸을 적부터 새벽 일찍 일어나시어 벼루에 먹을 가시던 조부님은 한지에 글을 써서 머리맡에 놓아두고 자주 고치시곤 했다.

한평생 그렇게 사셨으니 그분이 남긴 시고(詩稿)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기대와는 달리 한 조각의 묵적(墨跡)도 찾을 수가 없었다.

떠나시기 전에 이미 당신의 흔적을 손수 다 지우신 것 같았다.

그분이 아호를 후은(後隱)이라 하셨는데 두 글자 공히 드러나기를 마다한다는 뜻이 아닌가.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그분의 손때 묻은 시구(詩句) 하나 곁에 둘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그리고 다시 수십 년이 흘러갔다.

어느 날 조부께서 쓰시던 한적(漢籍)을 들추다가 어느 책갈피 속에서 한 조각의 시고를 발견했다.

 <丁亥生周甲(정해생주갑)>이라고 제한 율시(律詩) 한 수였다.

끝에 후은(後隱)이라는 서명이 있으니 분명 조부님의 글이다.

한 조각의 이 시고가 책갈피 속에 몰래 숨어 있다가 가까스로 환난을 피해 이렇게 남게 된 것이리라.

나는 조부님의 얼굴을 다시 뵙는 듯 감개무량했다.

조부님이 정해(丁亥;1887년)생이시니 그분의 회갑년은 1947년 내 나이 여덟 살 때다.

그 작품은 화갑을 맞는 감회를 읊은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내 한문 실력으로는 행서로 쓰여진 그 한시(漢詩)를 제대로 읽어내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해되었다.


    行年奄過六旬春 每到弧宴羨兩親 妓樂廢停追古訓 胚盤菲薄愧比隣
    承家未效靑氈述 照鏡空愁白髮新 畵帖瓊章成券軸 更將何物謝諸人

    세월은 흘러 어느 덧 육순의 봄이로다
    매년 생일 맞을 때마다 어버이 그립구나
    옛 가르침 따라 흥청대는 풍악은 멎게 했지만
    조촐한 음식상 손님들에게 미안키도 하네
    별 공적도 없지만 후손은 겨우 이었는데
    거울 보니 덧없이 백발만 새롭구나
    화갑을 기리는 화첩과 시문은 수북히 쌓였는데
    장차 무엇으로 고마운 이들에게 보답할 수 있으리.

 


일본에 유학을 가신 내 가친(家親)은 대동아전쟁 이후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고,

내 어머니께서 손재봉틀 하나 돌려 생계를 꾸려가던 어려운 때였다.

그런 가운데도 며느리 혼자서 시부모님의 화갑연을 마련해 인근의 어른들을 초대했다.

그 수연의 자리에서 손자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시시던 조부님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이 작품은 그러한 배경에서 쓰여진 것이니 내게는 만감이 교차하는 감동적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율시를 표구하여 내 서재의 머리맡에 걸어 놓고 거의 매일 바라다본다.

그러면서 이제는 모두 다 떠나고 안 계신 그분들을 생각한다.

출처 : 자연과 시의 이웃들
글쓴이 : 운수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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