情景交融 / 조 영 님
예로부터 시를 품평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에서도 情景交融의 작품을 최고의 시라 여겨왔다. 시인이 作詩할 때에 가슴속에 일어나는 감정을 '情'이라 한다면, 景은 시인의 머리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표상을 말함이니, 이 정과 경이 잘 융합하였을 때 비로소 훌륭한 작품이 된다는 뜻이다. 시는 시인의 정감을 중히 여긴다. 그렇다하더라도 景은 배제된 채 情만을 절제없이 직설적으로 표출한다면 餘味가 없는 물렁하고 맛없는 시가 된다. 마찬가지로 景을 그리되 景만을 지나치게 묘사하여 품고 있는 뜻이 없다면 뻣뻣하여 씹을 것이 없는 시가 된다. 말하자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정과 경의 균형감각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費經虞(비경우)는 '정, 경을 겸비한 것이 최상이요, 한쪽에 치우친 것은 그 다음이다(情景兼者爲上 偏到者次之)'라 하였다. 흔히 한시는 '先景後情' 즉, 전반부에서 景을 묘사하면 후반부에서는 情을 묘사하는 형식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明의 胡應鱗은 <詩藪>에서 '시를 짓는 단서는 情과 景 두 가지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오언율시의 경우 앞의 두 구가 起, 뒤의 두 구가 結이고, 가운데 네 구 중에 두 구는 景을 묘사하고 두 구는 情을 표현하는 것이 통례이다'라고 한바 있다. 후대 이론가들은 이 부분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는데 그 요지는 시에 있어서 정과 경을 마치 칼로 자르듯이 분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이다. '情과 景은 이름은 둘이지만 실제로 그것은 분리될 수 없다. 시에 공교로운 자는 情 가운데 景이, 景 가운데 情이 있게 한다.'라고 한 王夫之의 말은 정경론을 총괄하였다고 할 수 있다.
情과 景을 구비한 작품으로는 杜甫의 <月夜憶舍弟(달밤에 아우를 생각하며)>가운데 다음의 句가 유명하다.
이슬은 오늘밤부터 희고 (露從今夜白)
달은 고향에서처럼 밝구나(月是故鄕明)
위의 시는 난리가 난 직후 방랑하던 때 두 아우와 흩어진 채 생사조차 모르는 안타까움을 토로한 시이다. 양력으로 9월 8일이나 9일에 해당하는 날을 백로절이라 하니 가을도 중턱에 이른 때이다. 오늘밤부터 이슬은 하얗게 내리는데 밝은 달은 인간의 질곡과는 상관없이 고향에서처럼 청명하기만 하다. 여기서 '白'라는 색감은 왠지 모를 슬픔을 자아내게 한다. 白露, 明月은 시적 배경이 되는 경물이 된다. 이 경물 속에 고향과 두 아우를 그리는 심정이 잔잔하게 묘사되었으니 이를 두고 情景이 명쾌하게 짜여져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長安一片月(장안의 한 조각 달)'과 같은 시구를 보면 장안에 떠있는 한 조각달은 자신의 외로움과 멀리 간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자연스럽게 배어있다. 또 '詩成珠玉在揮毫(시가 이루어지니 주옥이 붓끝에 있다)'라는 시구는 완성된 시가 아름답게 여겨져 마음에 흡족해 하는 모양을 그린 것이다. 이 두 구 역시 정과 경을 통해 조화로운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인데 이 두 구를 구별한다면 전자는 景中情이요, 후자는 情中景이라 하겠다. 다음은 盧守愼의 <十三日到碧亭待人(열사흗날 벽정에 도착해서 임을 기다리며)>라는 시를 감상해보기로 하자.
曉月空將一影行 새벽달이 공연스레 그림자 하나를 함께 데리고가는데
黃花赤葉政含情 국화꽃 단풍잎이 잔뜩 정을 머금었네
雲沙目斷無人問 모래밭 저 끝까지에도 물어볼 사람 없어
倚遍津樓八九楹 난간을 에워돌며 서성거리네
詩題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시는 약속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오지 않자 초조해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약속한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나 새벽녘이 되도록 혼자이다. 새벽 달빛에 비친 국화꽃이며 단풍잎은 정을 다북히 담고 있으니 이것은 기다리는 사람에 대한 시인의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기다리는 임은 오지 않고 물어볼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碧亭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이제나 저제나 오실까 하면서 말이다. 시인의 깊은 정취는 바로 아득한 모랫벌이나 텅빈 다락이라는 경물을 빌어 표현되었다. 만약 경물은 버려두고 '약속한 임은 끝내 오지 않았네' 라고 말해버리고 만다면 참으로 무미건조한 시가 되어버리지 않겠는가?
다음은 조선 중기 삼당시인으로 알려진 이달의 <別李禮長(이예장과 헤어지며)>란 시이다.
桐花夜烟落 오동꽃은 밤안개 속에 지고
梅樹春雲空 매화나무에는 봄 구름이 떠돈다
芳草一盃別 풀밭에서 한 잔 술로 헤어지지만
相逢京洛中 서울거리에서 다시 만나세
위의 시는 봄기운이 감도는 때 서울로 가는 친구와 헤어지는 아쉬움을 담고 있다. 캄캄한 밤안개 속에 오동꽃은 하나둘 떨어지고, 매화나무에 봄 구름이 떠돌고 있다는 전구의 표현 속에 허망함과 비애가 짙게 배어있다. 특히 '梧桐'과 '梅樹'에서 드러나는 화사한 봄날의 정취와 상반되는 '落'과 '空'의 어휘에 함축된 정조가 그러하다. 이 비애는 당장은 헤어져야 하는 이별의 아쉬움을 말함이기도 하겠으나 나아가 가장 아름답고 화사한 봄날이 지나가버리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기도 하다. 즉 계절의 변화로 드러나는 자연의 추이를 통해 만물의 하나로서 인간의 생명도 시시각각 변하고 늙어가는 존재임을 자각할 때 느끼는 허허로움이기도 할 것이다.
이별의 자리에서 마시는 '一杯' 역시 헤어지는 섭섭함과 서울거리에서 다시 만날 것을 크게 기약한다는 함축적인 의미를 극대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五絶로 손꼽혀 회자되는 이 작품의 묘미는 情景交融을 통한 무한한 餘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자근자근 씹을수록 각별한 맛이 느껴진다.
(우이시 제141호)
'한시한담(漢詩閑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품과 인품 / 조영님 (0) | 2007.10.24 |
---|---|
함축 / 조영님 (0) | 2007.10.22 |
一字의 묘 / 조영님 (0) | 2007.10.21 |
시화(詩禍) / 조영님 (0) | 2007.10.15 |
용사(用事)와 점화(點化) / 조영임 (0) | 2007.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