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허난설헌의 수물일곱 연꽃 송이-- / 조성심

운수재 2007. 10. 24. 13:24

 

許蘭雪軒―스물일곱 연꽃송이를 남기고 떠난 사람 /   조 성 심

 

 

푸른 물결 선녀의 못에 물들이고

파란 난새는 각색 난새와 어울려라

아리따운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분홍빛 사라지니 달빛은 서리로 추워.

 

許蘭雪軒은 조선시대에 중국․일본에까지 文名을 떨친 시인이었다. 가부장적인 시대에서 그의 文章은 비난과 칭송을 함께 받았고, 그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마냥 거의 소실되어 버리고 말았다.

 

위의 시는 蘭雪軒이 스물일곱 살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작품이다. 문학적 재능도 인정받지 못하고 남편과의 생활도 어긋나가고 사랑하는 두 아이들마저 저 세상으로 보낸 후 어디에도 기댈 곳 없는 蘭雪軒은 죽음밖에 택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재능이 너무 아까워, 또 여자에게 쳐졌던 너무 두꺼운 벽이 야속해서 蘭雪軒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릿하다.

 

‘丈夫는 시대를 잘 타고나야 한다’는 말이 비단 남자에게만 국한될 수 있으랴. 蘭雪軒이 시대를 바꿔 태어났다면 그의 文才로 인해 우리의 문학이 좀더 격이 높아질 수 있었으리라.

무릇 뛰어난 예술가일수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아 남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받지만 스물일곱 나이에 생을 마감하는 글을 남기고 가버린 蘭雪軒은 그를 기리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스물일곱 살로 살아 있다.

 

그 蘭雪軒이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에 잠들어 있다는 신문기사와 지도책만을 들고 뜨겁던 여름날 오래 별러 왔던 마음 속의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나섰었다. 천진암에서 빠져나가 묘가 있을 만한 곳을 물었으나 오히려 나에게 사임당의 묘를 찾는 건 아니냐고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도 차도 지칠 무렵 갑자기 면사무소가 생각났다. 그래도 고장의 문화재이면 면사무소에는 위치가 알려져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안고 초월면 면사무소를 찾아 차를 몰았다. 수인 산업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니 파출소와 농협건물과 면사무소가 나란히 있었다. 반가워서 면사무소에 들어가서 물었다. 다행히도 蘭雪軒의 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종이에 약도까지 그리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관의 친절함이 너무 고마웠다.

 

벼와 콩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논둑을 지나자 산 언덕에 몇 기의 큰 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바로 저 곳일 거야! 반가운 마음에 눈앞에 나타난 작은 길로 무작정 들어서다 길이 막혀 후진을 해야 했다. 문을 열고 후진하다 길 옆을 보았더니 그 풀숲에는 아름다운 비밀의 화원이 펼쳐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달개비꽃, 주홍빛 콩꽃, 자그마한 하얀 풀꽃송이, 알록달록한 나비, 실잠자리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 놀라서 날아다니는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잔뜩 긴장하며 후진하다 만난 멋진 풍경이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묘가 있는 곳까지는 길이 잘 닦여져 있었다. 길을 따라 곧장 올라가자 蘭雪軒의 묘임을 알려주는 글이 써 있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살아 있는 蘭雪軒을 만난 것마냥 반가웠다.

몇 기의 묘가 층층히 서 있었고 묘 밑에는 제법 넓은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이렇게 큰 주차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언가 큰 행사가 있었음 직했다. 蘭雪軒의 묘는 경기 보물 90호로 지정되어 있었다. 안내글을 읽고 계단을 올라 묘에 이르렀다. 蘭雪軒의 묘가 가운데 있고 그 옆에 詩碑가 서 있었다. 그리고 묘 오른쪽에는 작은 초묘 두 기가 있었다. 詩碑는 1985년에 만들어졌는데 당시에 詩碑 제막에 힘을 모았던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蘭雪軒의 시가 비에 새겨져 있었다.

 

400년 전에 세상을 떠난 蘭雪軒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아까워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음에 너무 늦게 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蘭雪軒의 묘 앞에서 잠시 고개를 숙인 뒤 그가 남긴 시를 큰 소리로 낭송했다. 蘭雪軒이 들을 리야 없겠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나니 그에 대한 오랫동안의 그리움이 조금은 풀리는 듯했다.

 

碑의 뒷면에는 그의 시 <哭子>가 새겨져 있었다. 남편과의 사이가 원만하지 못해 홀로 시적인 상상력만 키워가던 생활에서 그나마 그에게 삶의 의미를 주던 아들과 딸이 다 자라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慘戚의 슬픔을 나타낸 시였다.

 

지난해 어여쁜 딸을 잃었고

이 해엔 귀염둥이 아들이 갔다.

서러워 서러워 광릉 땅

두 무덤 서로 마주 보네

쓸쓸하구나 백양나무 바람

도깨비불은 소나무 사이를 밝혀 주네

지전을 살라 너희를 부르다

맹물 한 잔 네 무덤에 부어놓을 뿐이네

알겠네 아우며 형의 넋이

밤마다 서로 따라 노니는 걸

 

시에는 광릉 땅에 묻혔다 하였는데 이곳 광주군까지 누가 이장을 하였을까? 저승에서나마 자식들을 쓰다듬으며 참척의 슬픔을 달래라는 후세 사람들의 배려인 것 같아 눈물겨웠다.

蘭雪軒의 묘 위에 있는 묘를 살펴보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난설헌의 남편 김성립은 재혼한 홍씨와 함께 합장되어 있었다. 김성립은 蘭雪軒이 죽던 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그 이듬해에 발발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전사하였으니 그 또한 짧은 생애를 마친 셈이었다.

 

다시 또 찾아오기는 힘들 것 같아 심호흡을 하며 눈 속에 가득 묘의 모습을 담았다. 대지를 녹일 것 같은 뜨거운 8월의 더위도 그리 무덥게 느껴지지 않았다. 蘭雪軒이 묻힌 묘의 하늘 저 위에서 그의 영혼이 배회하며 오늘 이곳을 찾는 낯선 발걸음들을 굽어보는 것 같았다.

묘 옆의 수도꼭지에서 시원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먼길 찾아온 사람을 대접하는 감로수인 것 같아 몇 모금 마시고 그에 대한 연민을 접으며 발길을 돌렸다.

                                                                                 (우이시 제14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