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네루다의 <시> / 김영탁

운수재 2007. 10. 20. 06:28

 

네루다의 「詩」김 영 탁

 

<詩>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시가/ 나를 찾아왔어.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어, 겨울에서인지 강에서인지./ 언제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도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으며,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거리에서 나를 부르더군,/ 밤의 가지에서,/

갑자기 다른 것들로부터,/ 격렬한 불 속에서 불렀어,/

또는 혼자 돌아오는 길에/ 얼굴 없이 있는 나를/ 그건 건드리더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 내 입은 /이름들을 도무지/

대지 못했고,/ 눈은 멀었으며,/ 내 영혼 속에서 뭔가 시작되고 있었어,/

熱이나 잃어버린 날개,/ 또는 내 나름대로 해보았어,/

그 불을/ 해독하며,/ 나는 어렴풋한 첫 줄을 썼어/

어렴풋한, 뭔지 모를, 순전한/ 넌센스,/ 아무것도 모르는 어떤 사람의/

순수한 지혜,/ 그리고 문득 나는 보았어/ 풀리고/ 열린/ 하늘을,/

遊星들을,/ 고동치는 논밭/ 구멍 뚫린 그림자,/ 화살과 불과 꽃들로/

들쑤셔진 그림자,/ 구부러진 밤, 우주를.

 

그리고 나, 이 微小한 존재는/ 그 큰 별들 총총한/ 虛空에 취해,/

신비의/ 모습에 취해,/ 나 자신이 그 심연의/ 일부임을 느꼈고,/

별들과 더불어 굴렀으며,/ 내 심장은 바람에 풀렸어.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시. 나를 긴장시키는, 나를 떨리게 하는, 첫사랑 같은 시. 소설을 쓰다가 문득 시가 된 운명. 그랬다. 시가 나를 찾아오기 전 난 “마약 같은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에 허덕거리고 있었다. 그 허기진 욕망의 속내를 과장한다면 고난의 과정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는 오디세이의 귀향 같은 영웅적 드라마와 선택받은 보상심리쯤으로 진단해 볼법하다. 그렇지만 그건 구들장군처럼 게으르고 아둔한 나에게 뜬구름 같았지만 광기에 가까운 열정과 노력에 힘입어(?) 빵에 실패한 현실을 스스로 자신을 위로할 줄 아는 정신적 대견함도 길렀다고 한다면, 그것도 보상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던 어느 날 시가 내게 왔다. 나라는 오래된 황무지에 시가 왔다.

그건 나를 미치게 하는, 목소리도 아닌 말도 아닌 침묵도 아닌 그의 <시>가 나를 불렀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 <시>는 벼락처럼 나를 감전시켰다. 이 시를 처음 만나고 나서 더 이상 나를 의심하지 않고 나를 사랑할 수 있었고 삶을 사랑할(지금도 노력중이지만)수 있다고 봐야겠다. 어째든 <시> 때문에 난 해방되었다.

 

네루다도 한때 구석에 몰린 쥐처럼 공포로 가득 찬 젊은 시절이 있었다. 동시대의 틀을 깨는 데 대한 두려움과 창조성에 대한 중압감 그리고 말 꼬랑지에 붙어사는 쇠파리 같은 비평가들에 의해 강요된 모든 법칙들을 깨는데 두려워했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그것을 극복하고 하고싶은 대로 말하고 하고싶은 대로 했다. 그리고 만년에 이 <시>를 썼다( 시집『낮은 손들』1968).

 

<시>가 가지고 있는 동력을 유감 없이 실현하는 물질적 세포해방군들은 ‘닫힘에서 열림으로, 신명을 살리고, 시간과 공간이 함께 하여 공간이 구체적으로 황홀히 찌그러지는’ 세계의 길항을 至福의 찰나로 인도한다. 그림으로 그려본다면(詩畵一致論에 입각하여) 나선형태의 역동성을 그려봄 직하다.

 

그의 시를 읽다보면 언어의 풍부함과 단순함을 느낀다. 그리고 언어는 세계를 만든다. 이 ‘만듦’의 창조는 시인의 자유로운 영혼의 영토 속에서 정말 실감날 수밖에 없다. 왜냐고 묻자(로버트 블라이) ‘새롭게(만듦/창조) 노래불러야 할 자연은 셀 수 없다’고 네루다는 말했다. 한국 시인들은 ‘단순하다’는 말에 퍽 민감하다. 그 말은 지적 기반인 사고나 정신의 결핍쯤으로 여겨 행여 시인 자신도 그런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되지도 않는 요설과 이미 죽어버린 글을 빈 수레에 싣고 요동을 치기도 하고 표절을 일삼기도 한다. 결국 자신감의 상실에서 오는 발버둥인데, 이런 시인은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밖에 못되는 즉, 행세하고 싶어하는 시인’이라고 봐야겠다.

 

네루다뿐만 아니라 정작 큰 시인들은 그 ‘앎’을 비우고 ‘단순함이 純靑된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작금에 와서 한국 문단을 네루다의 눈으로 진단한다고 가정하면 꽤 재미난 일일 것이다(이런 상상의 가정은 독자의 몫으로 남기고). 시에 대한 부위적인 나의 느낌이지만 우이시 제145호(2000년 7월호)에 임보 시인이 올린 권두시론의 소회를 내 나름으로 한마디하자면, ‘협소하고 앙앙거리는 뜨거운 양철지붕 같은 한국 문단’을 제대로 진맥한 거라는 생각이 든다.

 

파블로 네루다의 <시>는, 시가 잘 오지 않을 때 찾아가는 내 마음의 고향 같은 처소다. 항상 새롭게 시작하는 문학청년처럼 처음 만나는 첫사랑의 예감처럼 두근거린다. 이제 나는 문단의 말석에 이름 석자 겨우 올렸지만, 들뜨지 않고 내면의 침잠과 격동을 한 몸으로 안아주는 네루다의 <시>를 참으로 오래 음미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시>는 외로울 때나 분노가 가슴을 칠 때나, 술에 취해 버스 속에서 졸다가 종점까지 왔을 때나, 언제나 내 옆구리 가방에 끼고 있는 시집『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속에 있다.

(우이시 제14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