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사로잡은 한 편의 시

유치환의 <바위> / 최관하

운수재 2007. 10. 25. 10:39

 

유치환의「바위」―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최 관 하

 

어린 시절, 유․소년기를 지나며 책에 대한 사랑을 간직했다. 가정이 풍족하지 못하여 마음껏 책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주위 분들이 가끔 빌려주는 책으로 감사해했다.

중학교 1학년. 국어 선생님이신 이정세 선생님께서 "너는 무조건 국문과를 가라"는 한 말씀이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았다. 아니 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문학의 쇠사슬로 묶어 놓았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을 중시했던 조부의 가르침도 힘이 되었다. 간간이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아직도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야말로 감사한 조기교육(早期敎育)의 산물 아닌가.

학력고사 시절, 그저 시험을 보는 공부로 시를 외어야 했던 때를 떠올리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달래의 맛을 모르며 소월의 「진달래꽃」을 읊조렸고, 강진의 영랑 생가(生家) 돌담도 보지 못한 상태에서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를 외었다. 얼마 전 돌아가신 미당 선생님의 「국화 옆에서」도 텔레비전 광고에서 보았던 것으로 첫 대면을 하였다.

암울했던 시기라고 할까, 문학을 한답시고 글줄 나부랭이나 끄적이던 더벅머리 대학 시절도 쏟아놓은 감정의 편린(片鱗)들을 주체할 수 없어 그저 젊음의 기운으로 토해 놓았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서 그 글들은 표류하고 있을까.

입시를 목 앞에 갖다 놓고 공부를 강요당했던 그 시절에, 시험 준비로 외어야 했던 그 시 한 편이 마음에 강하게 남았던 것은 어려움과 힘듦의 연속에서 나의 의지를 키워나가고 있을 때였기 때문일 듯싶다.

청마 유치환의 일련의 시를 애송하며 청소년기를 지내왔다. 「깃발」이 그러했고, 「파도」가 그러했고 「행복」이 그러했다. 특히 「바위」는 불혹(不惑)을 코앞에 둔 지금도 자주 애송하는 시이다. 내적인 자아를 키워나가야만 되는 시기, 우리나라의 입시생들은 밤잠을 줄여가며 그렇게 삼 년을 하루같이 보내야 했고, 그 속에서 뒤떨어지는 자는 낙오자였다. 다행히 나는 잠도 많지 않았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싸우는 또 하나의 나는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누가 이기느냐 하는 긴 싸움이 계속되었다.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를 생각했던 적이 있다. 참으로 한스러웠다. 날개짓하다 추락하고 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이다. 마치 이상의 「거울」에 비쳐진 또 하나의 내가 본질적인 자아가 아닌가 하는 고민의 늪에서 허우적대기도 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먼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의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무척 강한 화살처럼 뇌리에 박히는 구절이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하고자 하는 것은 외적인 상황에서의 승리도 된다. 결국 싸움이라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항시 강한 면을 보이고 그러나 침묵하며 각종 감정과 모진 고난을 참고 견뎌내는 바위의 속성이 나를 끌기에는 충분했다.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결국 나는 설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나이가 든 지금도 이 시는 내 가슴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세파에 허우적댈 때도 있지만, 청소년기의 한 편의 시의 감흥이 이토록 오랫동안 나의 살이 되고 피가 될 수 있음은 실로 감사한 일이다. 가뜩이나 어렵고 힘든 시대 상황에서 얼마나 나와의 지독한 투쟁을 우리는 해야 하는가.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로 살리라. 그렇게 살리라 다짐하며 청년기를 지나왔다.

가진 자가 더욱 가질 수 있는, 그래서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가 더욱 가질 수 없는 현실에서 우리는 어떤 삶을 가져야 하는가. 자신을 제어하고 의지를 다지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인격의 수양이나 의지의 단련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지 않은가.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야 하는 책임. 아니, 사명이라고나 할까.

나의 내면을 키우고 가다듬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하면서,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이 마음이 이 몸이 세상을 아름답게 꾸미는 데 보탬이 된다면, 사용되고 싶다. 그래서 내적인 인내, 절제의 훈련과 밖으로의 헌신, 봉사가 참으로 이 세상을 따스하며 정겹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청소년기 나의 머릿속에 강한 의지를 키워 주며 삶의 고난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준 청마의 '바위'는 실로 영원히 내 마음속에 살아 읊조려지리라 생각된다.

                                                                                           (우이시 제151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