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상 유공희의 글/유공희는 누구인가

기품 있는 젠틀맨 / 최승범

운수재 2007. 11. 5. 13:19

 

[회고담]

기품 있는 젠틀맨

                                                                                                                          최 승 범

 

세상은 때로 이러한 일로 하여 기쁘고 즐겁기도 하다. 또 자성의 기회도 갖는다. 지난 9월 들어서의 일이다. 『우이시』(2007.8.)를 펼쳐 읽다가 임보 시인의 칼럼에 눈이 멎었다. 그 제목은 ‘유공희(柳孔熙)의 「ILLUSION」'이었다. 내 기억속의 한자 이름까지도 같았다. 바로 내 고등학교 때의 국어 선생님, 그 ’유공희‘가 아닌가. 칼럼을 읽기에 앞서 가슴부터 설레었다. 틀림이 없었다. 유공희 선생님이 분명했다. 나는 바로 임보 시인께 편지를 올렸다.

 

― ‘<유공희의 「ILLUSION」>을 읽으며 깜짝 반가웠습니다. 유공희 선생은 제 고등학교 때의 은사이셨기 때문입니다. 남원농업고등학교에서 서울 어느 고등학교로 가셨다는 소식 후에 선생님을 다시 뵈옵지 못 하였습니다. 사백님의 글에서 그 선생님을 뵈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계획하신 유고집이 간행되면 저에게도 읽을 수 있는 기쁨 다시 주시기 바라니다.’

 

대충 이러한 내용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임보 시인과 이이화(李離和) 선생의 청으로 이 글까지 쓰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유공희 선생을 내가 처음 뵈온 것은 내가 순창농림학교에서 남원농림학교(당시 중3․고3으로 분리)로 전학한 1948년의 가을이었다. 나는 당시의 제도에서 ‘월반시험’에 합격하여 1949년 남원농림고등학교를 마쳤으니, 선생으로 모신 것은 1년에 불과했던 셈이다.

그것도 유공희 선생은 다른 반의 국어를 맡고 계셨기 때문에 교실에서 뵈올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었다. 주로 방과 후의 교무실이나 저녁 시간 사택에서 뵈올 수 있었다.

 

저때 나는 방과 후 활동으로 문예반에 들어 있었다. 김종기 선생(나의 반의 국어 담당)도 유공희 선생과 함께 문예반 지도를 맡고 계셨다. 문예반 학생 대표는 양창식(梁昶植, 뒷날 제11, 12, 14대 국회의원) 선배였다. 다음 해엔 나의 월반으로 동급생이 되었던 양 선배는 교지 『요천(蓼川)』의 창간을 제의하여 나도 편집을 거들기로 하였다.

 

자연, 문예부 학생들의 작품을 가지고 유공희 선생님과도 의논을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마다 선생님께서는 작품에 대한 준절한 말씀이셨다. 그리고 『요천』에의 게재 여부도 결정하여 주셨다.

「봄」이었던가. 나의 습작도 보아주시도록 하였다. ‘이걸 시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씀이었다. ‘감정적일 뿐, 알갱이가 없지 않느냐’는 지적이셨다. 양창식 선배는 내가 쓴 무슨 기사문이었던가, 그 원고를 읽고 생략법의 남용을 지적하여 주기도 하였다.

 

1948년의 한글날이었다는 생각이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한 교내 학생의 작품 모집이 있었다. 나는 <한글과 세종대왕>으로 응모하였다. 최우수작이라 하여, 전교생의 조회시간에 낭독한 바 있었다. 두 분 선생님께서 당선작으로 뽑아주셨을 것이나, 선후평은 없으셨다.

 

저때에는 유공희 선생의 아호가 ‘유상(愉象’인 것도 몰랐다. 학생들은 선생의 고향은 남원의 이웃인 장수로 알고 있었다. 임보 시인의 칼럼에서 알게 된 선생의 생몰연대로 미루어 보면, 선생은 내 나이에서 9년이 위이셨다. 내가 뵈온 선생은 저때 26세의 젊음이셨던 셈이다. 그런데도 선생은 언제나 굵은 검정테 안경에 정장을 하셨고, 학생들 간에는 ‘기품 있는 젠틀맨’의 우러름을 받으셨다. 선생은 약간 혀끝소리가 짧은 듯한 말씨였다. 나로서는 선생의 저 어조(語調)가 외려 매력적이고, 정감 또한 더하였다.

1949년(당시 학년말은 6월 30일), 나는 남원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선생은 그해 8월 17일자로 남원농고를 떠나셨으니, 나는 선생이 떠나실 때 뵈옵지도 못했고, 어느 학교로 전임하셨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8월 17일자를 알게 된 것은 이번에야 모교에 추심하였기 때문이다.

 

분명, 저때의 교지 『요천』에 선생의 글을 받아 올렸으리라는 생각이나, 오늘날 교지 『요천』도 찾아볼 길이 없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대학 국문과를 다니면서나 문학의 길을 걸어오면서 선생을 아주 잊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 문득문득 선생의 말씀, ‘시에는 알갱이가 있어야지’가 떠오르고, 선생의 혀끝소리 짧은 말씨와 굵은테의 안경 너머 눈빛이 눈앞을 가라들기도 하였다.

 

오늘에 이 말을 어찌 떳떳이 할 수 있겠는가. 반 세기가 다 되는 세월, 선생께서 어느 학교, 어느 곳에, 어찌 계셨는지도 모르고, 선생께서 언제 유명을 달리하셨는지도 아지 못한 채 있었지 않은가. 이 무슨 학생이요 제자라고 이제 얼굴을 내밀 수 있겠는가. 스스로도 넉살 좋다는 생각이다.

뒷날 어느 공간이 있어 선생을 다시 뵙는다면, 선생께서는 어떠하신 안채(眼彩)로 이 학생, 이 제자를 맞이해 주실까.

삼가 두 손 모아 유상 선생의 명복을 빌어 올린다. (시인, 전북대 명예교수)